▲일출봉 분화구성산은 북서쪽 사면이 사주로 연결된 것 말고는 원래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천혜의 요새다. 김상헌은 우물이 없다 했지만 분화구 서쪽 바위 틈에는 ‘생제’라는 작은 샘이 있다.
제주관광공사
군비강화보다는 교역증진이 평화 기여
성을 쌓으려는 마음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은 내는 자 흥한다'는 말도 있지만, 중국 만리장성이든 우리 천리장성이든 영국 하드리아누스 장벽이든 길고 긴 성도 방어에 도움된 적은 거의 없다. 오늘날 남북한과 주변 강대국들이 교훈을 얻는다면 군비강화보다는 교역증진이 평화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경록은 폄하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임진왜란으로 8도가 유린될 때 제주도는 유일하게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후방기지 구실을 했는데 당시 제주목사가 이경록이었다. 수령의 임기는 5년이 원칙이었는데 힘든 제주목사는 2년 반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286명이었고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에 불과했는데 이경록은 무려 6년 5개월간 재임했다.
그는 1576년 식년시 무과에 병과 3위, 곧 전체 11등으로 급제했는데, 바로 아래 12위가 이순신이었다. 둘은 '임관 동기'로서 이경록이 경흥부사, 이순신이 조산만호였을 때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해 백성 160여 명을 납치해 간 사건이 터졌다. 상관인 북병사 이일의 책임이 컸으나 둘은 죄를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라는 처벌을 받았다.
동병상련이었을 둘은 편지 교환도 자주 했고 임진왜란 때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군수물자도 지원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소 다섯 마리와 양식을 보내와 부하들을 잘 먹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제주 군사의 육지 파견을 거부한 이유
<선조실록>에는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힘을 합쳐 전진하여 토벌하고자 하여 조정의 하명을 청합니다"라고 장계를 올리자 비변사가 임금에게 불가하다고 품의하는 대목이 있다.
"탄환 같은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되는데 어떻게 주장(主將)으로서 진(鎭)을 떠나 바다를 건너 멀리 천리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전세가 다급한 판국에 얼핏 생각하면 불합리한 이 의견을 선조가 따른 것은 제주마저 전쟁터가 되면 안 된다는 판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대륙이나 반도 주변의 섬들은 육지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에 끼어들거나 군사기지를 제공했다가 전쟁의 참화를 당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오키나와 참사가 재연될 뻔한 제주도
'무방비 도서'였던 울릉도를 예로 들면 동해에서 해전을 벌인 러일전쟁 때는 물론이고 한국전쟁 때도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상륙한 적이 없다.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본토의 운명을 따르게 돼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면 그만큼 전력손실이 오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가 함락되자 제주도를 최후의 저항기지로 삼고 결7호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계획에 따라 제주도 방어를 위해 관동군으로 악명 높은 제121사단까지 끌어들여 45년 8월에는 7만명 규모 58군을 편성했다.
이때 옥쇄작전을 위해 제주 해안과 산악지대에 구축한 동굴진지가 지금도 700여 개나 남아있다. 해안에 설치한 특공기지는 송악산, 일출봉, 서우봉, 수월봉, 삼매봉 5곳인데, 가이텐(回天)으로 유명한 자살특공대용 어뢰정과 잠수정 등을 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