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대취타 공연 모습
국립국악원
대취타(大吹打)의 령이 나렸다. 포부도 당당한 대취타를 앞장세우고 좌우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수백 필의 말을 탄 호위병들이 일렬 횡대를 지으며 출궁하면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위장한 그 대열을 보기 위해 임금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거리에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울이 온통 사람바다를 이룬다. 구경 온 사람들이 다시 행렬을 이루어 따라가면 정말 어마어마한 대열을 만들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대열을 이끌고 가는 대취타가 있다. 대취타는 대취대타(大吹大打)의 준말이다.
대취타! 그것은 어느 서양인이 느낀 그대로 우주의 신비와 인간사의 애원이 담긴 소리일 것이다. 인간사의 애원을 담은 태평소가 하늘 높이 메아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광대한 우주가 포효하는 것 같은 기상을 담은 나각과 나발이 어울려 제각각 마음 내키는 대로 그러나 아주 규칙적으로 야단스럽게 호령한다.
자바라와 용고 그리고 장고 같은 타악기들도 저절로 신이나서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 천지인이 하나가 돼 개벽의 새세상을 만들고 난 후 신나는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대취타는 그렇게 위엄 있고 장대하고 신나는 소리이다.
대취타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로 1971년 6월 10일 지정됐고 1998년 6월 5일 대취타에서 피리정악 및 대취타로 명칭이 변경돼 보존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취타는 대한제국 대취타의 마지막 명맥이었던 당시 겸내취(兼內吹) 임원식(林元植)에 이어 최인서(崔仁瑞)가 겸내취의 법통을 이어 왔으며, 현재는 정재국(鄭在國)으로 이어오고 있다.
대취타에 대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취타란 부는 악기(취악기)와 치는 악기(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대취타는 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 또는 개선 등에 취타와 세악(비교적 음량이 적고 실내에 알맞은 악기들로 연주하는 국악 합주)을 대규모로 연주하는 것으로, '무령지곡'이라고도 한다. (...) 취타수들은 황색 옷을 입고 남색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악기는 징, 장구, 북, 나발, 소라, 태평소 등으로 편성된다.
(...) 한말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후 형식을 갖추어 연주한 적은 없으며, 민간의 광고악대나 사찰의 의식에 사용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거의 절멸상태에 있다. 대취타는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한층 더 느끼게 해주는 고귀한 음악으로 그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재다.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느끼게 해주는 대취타. 지금은 일부만 남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지만 왕의 거둥이나 귀인의 행차, 그리고 군대행진에서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영문(營門)에 소속된 취타수(吹打手)에 의해 연주되던 행진곡 풍 군례악(軍禮樂)이며, 아명(雅名)으로는 무령지곡(武寧之曲), 속명으로는 대취타, 세칭 구군악(舊軍樂)으로 칭했다.
그리고 취타를 달리 고취(鼓吹)·고취악(鼓吹樂)이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치는 악기와 부는 악기의 연주라는 뜻으로 취타와 같은 말이다. 곧 불고 치는 군악기에 북·장구·피리·젓대·해금이 취타에 합쳐진 것을 대취타라 했고, 순수한 군악기 만의 취주(吹奏)를 취타라 하고, 피리·젓대·해금 같은 일반악기의 취주를 세악(細樂)이라 하였다. 취타의 주자(奏者)를 취고수(吹鼓手) 또는 취악내취(吹樂內吹)라 하며, 세악의 주자는 세악수(細樂手) 또는 세악내취(細樂內吹)라 하였다.
취타와 세악으로 구성된 대취타와 악수 중 황의초립(黃衣草笠) 차림의 취악내취는 호적·나발·나각·대각·발라(鈸鑼)·장고·용고(龍鼓)·징(鉦)·나(鑼) 등의 악기로 한 조(組)를 이루어 군중(軍中)의 행진곡·승전곡의 취타를 주로 연주하고 세악수 연주에도 합주했다.
오늘날 전하는 대취타의 악기 구성은 다음과 같다.
태평소는 나무로 된 원추형의 긴 관 끝에는 금속성의 나팔꽃모양의 동팔랑(銅八郞)이 있어 음색이 강하고 화려하며 높다. 태평소는 국악기 중 가장 음량이 큰 선율 악기인데, 소리는 거칠지만 장쾌하고, 때로는 애처로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부는 방법에 따라 배음연주가 가능하나, 대취타에서는 한음만 길게 끌어 연주한다.
자바라는 바라 혹은 제금이라하는데, 중동지방의 '찰바라'라는 말의 한자 표기를 우리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라 한다. 대취타는 물론 불교의식이나 굿에서도 많이 쓰이는 자바라는 절에서 쓰는 동발, 궁중무용에 쓰는 향발 등이 있다.
용고는 북통에 용그림이 그려져 있는 북이다. 보통 북을 매는 방식과는 달리, 용고는 배에 수평이 되도록 하여 북면이 위, 아래를 보도록 매는 게 특이하다. 북통에 세 개의 고리가 있고 여기에 끈을 매어 허리와 어깨에 돌려 묶은 다음 양손에 북채를 들고 북의 윗면을 두드린다.
나각은 '나(螺)' 또는 '소라'라고도 한다. 바다에서 사는 큰 소라를 잡아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吹口)를 만들어 끼운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朱螺)을 하여 모양을 내어 치레하기도 한다.
이 악기는 낮은 외마디 소리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낸다. 연주법은 나발과 같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김을 불어넣어 입술의 진동으로 소리 내는데, 음높이는 소라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나발은 놋쇠로 긴 대롱같이 만드는데, 부는 쪽은 가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굵어지면서 끝이 퍼져있다. 길이는 약 115cm이고, 금속성의 우렁찬 음색을 가지며, 보통은 낮은 음 하나만 길게 냄. 군중(軍中)에서 신호하는 데 쓰였고, 대취타·농악 등에도 사용됐다.
징은 놋쇠를 녹여 둥근 그릇 모양의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물악기다. 크기는 지름이 대략 21㎝부터 50㎝까지 비교적 다양하다. 지름이 크고 재질이 두꺼울수록 울림이 깊다. 징채는 긴 나무막대 위에 헝겊을 감아서 만들거나, 짚을 사용해서 통으로 끝이 뭉툭하게 만들어 쓰기도 한다. 징 외에도 금金, 금징(金鉦), 대금大金, 고취징(鼓吹鉦), 대양 등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장구 등으로 현재 구성돼 있다. 그리고 악기 외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사(執事)는 지휘봉이라 할 수 있는 등채를 들고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하고 호령하면 연주가 시작된다.
숭례문 밖 나오시니, 계라차지(啓螺差知) 선전관이
자주 걸어 예까지 와서
취타를 청한 후에, 겸내취 패두(牌頭) 불러
취타령을 내리오니, 겸내취 거동 보소.
초립(草笠) 위에 작우(雀羽) 꽂고, 누런 천익(天翼) 남전대(藍纏帶)에
명금삼성(鳴金三聲)한 연후에, 고동이 세 번 울며,
군악이 일어나니, 엄위한 나발이며,
애원한 호적이라.
정기(旌旗)는 표표(飄飄)하고, 금고(金鼓)는 당당하다.
한가운데 취고수는, 흰 한삼(汗杉) 두 북채를
일시에 수십 명이, 행고(行鼓)를 같이 치니
듣기도 졸거니와, 보기에도 엄위하다. '한양가(漢陽歌)', 1844, 헌종11년
오늘날 대취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한양가다. 겸내취는(兼內吹)는 조선후기에 선전관청에 속해 군영의 훈련·왕의 거둥·상참(常參)·조참(朝參) 등의 의례, 진연(進宴)·진찬(進饌) 등의 연향에 참여해 연주한 악대다. 겸내취는 황철릭(黃天翼을 착용했는데, 현재 대취타 연주의 복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겸내취의 악기 편성은 대개 나발(喇叭)·나각(囉角)·자바라(啫哱囉)·호적(胡笛)·용고(龍鼓)·정(鉦)·라(鑼) 등이고, 규모는 의례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전좌시위(殿座侍衛)에서는 23명, 동가시위(動駕侍衛)에는 6명에서 77명, 궁중연향에서는 10명 내외로 구성됐다. 겸내취는 왕의 거동이나 궁중의례, 그리고 궁중잔치 등 다양한 쓰임세를 가진 편성이며, 겸내취가 바로 오늘날 대취타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취타의 시작과 다르게 명금삼성 즉 징을 세 번 치고 고동 즉 나각이 세 번 울며 군악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대취타곡은 장(章)은 7장으로 구성됐으며, 1장단은 12박(拍)으로 소삼(小三)·대삼(大三)이 모여 이루어졌다.
이 곡은 모두 19각 반각(제1각 제1박에서부터 제20각의 제6박까지)으로 돼 있는데, 제7장 끝에서 제1장 제3박으로 반복하는 도드리형식(還入形式)으로 돼 있으며, 각 장은 장단의 처음 또는 중간에서 시작하고 끝맺는 부정형(不定型)으로 분장(分章)돼 있는 것이 다른 곡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