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선생유배지 전면 모습이다. 가운데 건물이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가 있는 비각이다. 송시열이 짓고 전서는 민유중이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김재근
김정희와 이상적, 조광조와 양팽손은 닮은꼴이다. 김정희와 조광조는 한겨울이었고, 이상적과 양팽손은 푸르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이자 잣나무였다. 이들의 의리를 세한지교라고 한다.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으로 유배(流配)를 갔다. 그는 천재였다. 시, 문장, 글씨까지 막힘이 없었다. 조선의 원조 한류 스타이기도 했다. 제자 효명세자가 죽자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는 그를 대역죄인이라 하였다.
탱자 가시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은 고달팠다. 한겨울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풍토병도 괴로웠다. 친구도,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한양의 지인들도 점차 소식이 끊겼다.
제자 이상적(李尙迪)만은 변함이 없었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공자 말을 그림으로 그려 고마움을 표했다.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는 그렇게 그려졌다.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집 한 채, 배경도 없고 색채도 없다. 황량하고 춥다. 능주도 그랬다.
선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로 유배를 왔다. 연산군이 쫓겨났다. 중종반정이다. 왕은 한 일이 없었다. 출발부터 눈칫밥이다. 오죽했으면 공신이 시킨다고 조강지처까지 버렸을까. 재위 기간 38년, 존재감이 없었다. 역사에서 조금이라도 들먹여지는 건 순전히 조광조 덕이다.
조광조가 문제다. 조선에서 왕을 제외하고 제일 유명한 인물 셋이 있으니 정도전, 조광조, 흥선대원군이다. 다들 말년이 좋지 않았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이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다. 그런데도 버텨내질 못했다. 자기는 뭐가 있는가, 충만한 똘끼(?) 뿐이다.
별명이 '도덕 교과서'다. 조광조를 따라 하면 바로 성인의 삶이 되었다. 해가 떠도 달이 떠도 한결같았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리해서는 안 된다. 저리하면 나쁘다… .' 왕은 지쳐갔다.
급기야 밥그릇까지 손을 댔다. 중종반정 공신 중에 가짜가 섞여 있으니 솎아내자는 것이었다. 밥그릇을 지킴이로 벌레가 나섰다.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썼다. 조(趙)씨가 왕이 된단다. 벌레가 한글도 아니고 어떻게 그 어려운 한자를 쓰겠는가. 얼마나 미웠으면 조광조, 훅, 보내버리려고 날밤을 새워가며 나뭇잎에 구멍을 뚫었을까. 기묘한 일이 벌어진 기묘사화다. 많이 죽고 쫓겨났다.
조광조는 엄동설한에 유배형을 받았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한양에서 화순 능주까지 천 리가 여드레 길이었다. 북쪽 찬 바람 몰아치는 관비의 집에 묵었다. 억울했을 것이다. 매일 임금을 그리며 방문을 열어놓았다 한다. 엄동설한에 얼마나 추웠을까. 그렇게 25일을 지내다가 사약을 받았다. 능주에서 그의 삶은 잠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