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왼쪽)과 김철(오른쪽)
독립기념관
이처럼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김구 일파와 조소앙·김철 일파가 반목하는 가운데, 갈등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무회의 종료 후 5일 뒤인 1932년 5월 21일 중국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안창호를 비난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안창호는 이미 비혁명적 경지에 전락한 자로 미국에서 돌아온 후 그가 통솔하는 단체에는 친일 주구들이 섞여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격분한 이들이 탐문한 결과, 해당 기사는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 위원의 한 사람인 지주칭(稽翥靑)의 기고로 밝혀졌다. 이들은 지주칭을 찾아 추궁했다.
"이런 기사를 쓴 이유가 무엇이오?"
"안창호 선생의 죄가 경감될까 하는 희망에 쓴 것이오."
"거짓말 하지 마시오. 중국인인 그대가 한국인들의 사정을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으며, 또 무슨 이유로 그것을 확신한단 말이오?"
마침내 지주칭이 실토했다.
"사실 조소앙·김철·김석 등에게서 들어 아는 것이니 내게 무슨 책임이 있겠소?"
격분한 청년들, 항저우 판공처를 습격하다
금전 문제로 조소앙·김철 일파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김구는 안창호에 대한 비난 기사의 출처가 이들이라는 사실을 포착하자 이유필 일파와 대책을 협의했다. 그리고 5월 28일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등을 항저우 임시정부 판공처로 보내 조소앙·김철을 면담케 했다.
판공처를 습격한 문일민 등은 조소앙과 김철을 만나 횡령 혐의를 추궁했다.
"중국 측이 제공한 돈을 횡령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 자금은 우리들 개인에게 쓰라고 준 것이오."
조소앙 등의 답을 듣고 분개한 일행은 두 명을 폭행하고 소지금(조소앙으로부터 900불·김철로부터 100불)을 탈취한 뒤 상하이로 귀환했다(다만 실제 폭행이 이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구타가 이뤄졌다고 하나, 문일민 등은 훗날 '우리의 기관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모욕하거나 구타하지 않고 정중하게 힐문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당시 조소앙·김철은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과 문제의 <시사신보> 기사에 대해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 실제로 사건 이튿날, 외무장 조소앙의 사표 제출을 시작으로 6월 2일 나머지 4명의 국무위원(이동녕·조완구·김구·김철)이 전원 사표를 제출함에 따라 임시정부는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을 주도한 문일민 일행은 6월 3일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자신들이 판공처를 습격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우리는 소앙(조소앙)이 외교의 책임자로서 혁명영수 및 전체 교민이 불법한 체포와 유린을 당하는 것을 보고 또 철(김철)이가 여러 기관의 재정책임자로서 동지의 생사에 상관없이 앞장서 도주한 뒤 두 사람이 짝지어 호산풍경(湖山風景)을 즐기며 좋은 술과 좋은 요리에 즐거운 세월을 보낼지라도 오히려 책임을 묻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외국인과 외국 신문을 이용하여 적의 포로가 된 혁명영수(안창호)를 음해하며 동지를 능욕하고 당을 훼멸하며 민족을 말살시키는 그 매국적 행위만은 일각이라도 속히 방지하지 않으면 우리 앞길에 막대한 해독이 있을 것이다." -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趙素昻, 金澈 等의 無恥한 行動을 懲戒하고서>, 193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