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 4거리. 휘황한 최신식 빌딩이 숲을 이뤄 뒤바뀐 산업구조의 상징처럼 서 있다.
이영천
1964년부터 수출을 기치로 내걸고 조성된 공단은 당시로선 놀랄 만한 규모였다. 높은 굴뚝에 엉성하게 지어진 공장에서 기계처럼 일해야만 했던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린다. 비좁은 쪽방을 전전해야 하는 비참한 생활환경은, 도시의 다른 곳과 분절된 또 다른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곳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흡입력은 노동, 자본, 꿈, 희망, 인권은 물론 알량한 자존심까지를 망라했다. 배타적 공간으로 내몰렸다. 노동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고 혐오와 비하를 버무린 공순이 공돌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다. 누이와 형이었고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고, 고된 노동 후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 한잔 들이붓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디지털로 변태하지 않은 아날로그 흔적을, 그래서 더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단했으되 아련한 우리네 청춘의 한 페이지 같은.
벌집에 사는 공순이 공돌이
노동자가 살던 집을 '벌집'이라 불렀다. 열악한 칸막이였을 뿐 결코 주거공간이 아니었다. 코딱지만 한 부엌에, 서넛이 눕기에도 비좁은 방 하나가 딸렸다. 화장실은 물론 수도도 공동이다. 새벽부터 긴 줄을 서야만 겨우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달방'이라 부르는 허술한 벌집은 무수한 청춘의 빛나는 시간과 살과 뼈,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함에도 수많은 누이와 형, 친구가 불나비처럼 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