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가 배부된 12월 9일, 한 고등학교 교실의 모습.
연합뉴스
소위 '명문대' 출신 교사라는 건, '훈장'이면서도 '족쇄'다. 대학을 졸업한 지 25년도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학벌의 위력은 살아있다. 아이들은 내 멀쩡한 이름과 전공 교과보다 출신 대학을 먼저 기억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오래전 졸업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강의의 내용을 신뢰한다. 마치 저명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고백하자면, 가짜뉴스라고 해도 공중파 방송사의 앵커의 목소리로 소개되면 진실처럼 여겨지는 현상을 빗대며 아이들 앞에서 자학하듯 이를 문제 삼은 적도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명문대 출신 교사의 자질을 더 높게 평가한다. 학벌과 자질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건데,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명문대 진학생이 많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자녀도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을 것으로 여기는 심리와 비슷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적이 우수한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재능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는 것 또한 공부를 잘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로지 점수로 줄 세워 당락을 결정하는 교원임용시험 제도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운신의 폭 좁히는 족쇄가 된 명문대 졸업장
명문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1타 교사'로 인정받고 있으니 대학 졸업장이 '훈장' 역할을 한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이 되레 운신의 폭을 좁히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껏 꾸준히 집회에 참여하고, 틈틈이 이곳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학벌 구조 타파를 외쳐온 터다.
"허구한 날 학벌 구조를 허물어야 한다면서, 선생님은 왜 명문대를 선택하셨어요?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 심보 아닌가요?"
한 아이의 느닷없는 질타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꾸하든 궁색한 대답이 될 것 같아 나중에 대화하자며 꽁무니를 뺐다. 그의 눈에는 지금껏 학벌의 혜택을 톡톡히 봤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행태로 비친 모양이다. 표면적으론 그렇게 여겨질 법도 하다.
그 덕분에 30년도 더 지난 내 고등학교 생활을 반추해보게 됐다. 학력고사 체제였던 당시에는 고3 진학 담당 교사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의 승낙과 동의 없이는 대입 원서도 낼 수 없었다. 그가 낙점한 대학과 학과를 군말 없이 선택했다. 흥미와 적성 따위는 '개나 줘버렸던' 시절이었다.
고3 담임 교사가 쓰라고 해서 썼고, 가라고 해서 갔다면, 나더러 '사다리 걷어차기 심보'라던 그 아이는 이해할까. 사실이 그랬다. 당시 명문대를 선택한 건 내신과 모의평가에서 그만한 성적이 나와서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학과를 스스로 선택한 것만도 나름 큰 행운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다 그랬다. 누구 하나 교사 앞에서 토를 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를 달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학부모도 자녀의 대학 진학에 대한 모든 권한을 교사에게 위임한 채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그대로 따랐다. 버젓이 촌지마저 오가던 참람한 시절이었다.
그때도 오매불망 명문대에 못 보내 안달이었다. 학교 교문마다 명문대 합격자의 이름을 적은 현수막이 경쟁적으로 내걸렸고, 그 숫자가 명문 고등학교를 결정짓는 절대적 기준이었다. 고등학교마저 시험을 치러 입학하던 비평준화 지역에서는 교복이 '신분증'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공부가 맹목적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대학에 진학한 뒤다. 오로지 대입 하나만을 바라보고 죽기 살기로 달려왔으니, 맹목이라는 한자어 그대로 눈먼 공부일 수밖에 없었다. 대입은 아이들이 올곧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제도였다.
'중경외시' 아래로 '건동홍, 국숭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