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식의 상하이 망명 소식을 보도한 1924년 4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
막대한 재산을 가진 그가 상하이로 오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그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 1922~1923년의 재정 수입이 1921년도에 비해 10~20%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열악했던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민정식의 후원이 절실했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에 민정식의 거처를 마련해준 뒤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민정식에게서 자금을 후원받기 위해 교섭하는 과정에서 다소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모양이다. 임시정부에서는 프랑스 영사관의 청원 경찰에게 요청하여 민정식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는 등 그를 거의 감금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 김구가 휘하의 나석주(羅錫疇)·최천호(崔天浩)·손두환(孫斗煥) 등과 모의하여 민정식을 잡아다 감금한 후 그의 부인에게 "돈을 내놓지 않으면 남편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한편 일제 역시 막대한 자금이 임시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상황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민정식의 장인으로 과거 일진회(一進會) 회원이기도 했던 이범철(李範喆)이 사위의 재산을 가로챌 목적으로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민정식의 구출을 요구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일본 영사관은 프랑스 영사관에 "본국 신민이 감금되어 있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일본 영사관은 "프랑스 조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민정식의 재산을 탐내고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며 "한국인들은 민씨 부부를 사실상의 죄수처럼 감금해왔으며 무력과 폭력으로 위협하며 친지들조차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고 구출 공작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마침내 일제는 12월 10일 일본인·중국인 형사들을 이끌고 민정식의 집에 들이닥쳐 민정식 일가를 납치, 일본 영사관으로 끌고 가버렸다.
이 사건으로 임시의정원 내 개조파 세력은 이동녕 내각에 책임을 물어 사퇴를 압박했다. 결국 하루만인 12월 11일 이동녕이 사퇴하면서 박은식이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됐다.
그러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동녕 한 사람만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내각 전체가 총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때 마침 윈난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귀환한 문일민 역시 민정식 사건에 분개하여 이동녕 내각 총사퇴에 앞장섰다. 그는 윈난강무학교 동문 이기용(李基溶)·손효식(孫孝植)·김동욱(金東旭)·안경근(安敬根)·이웅(李雄)·김엄해(金奄海)·김태원(金泰源)·주부정(朱富丁)·차정신(車貞信)·이희연(李希渕) 등과 함께 12월 17일 연명으로 민정식 사건을 규탄하는 '경고(警告)'를 발표했다.
이들은 민정식 사건의 책임자로 이동녕·이시영·김구·윤기섭을 콕 집어 언급하며 헌법을 수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 요인들이 오히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재산을 보유할 권리',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감금·신문·처벌을 받지 아니할 권리',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가택의 침입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할 권리' 등을 침해한 사실을 지적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민정식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감금하다시피 하는 과정에서 정식 경호원이 아닌 사적으로 고용한 순포(巡捕)를 동원했다는 점이다. 문일민 등은 이를 비판하면서 "비법(非法)의 수단 방법을 취하야 집권자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훼손케 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직간접적으로 심리적 변동을 (가져오고) 실제의 사실에서 그 끼친 악영향이 실로 적지 않다"고 통렬히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