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을 이어간 피켓 인사는 그의 진정성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도구였다
백성호
노동조합 활동만 했다 보니 시민들에게는 처음 보는 후보였다. 그가 택한 방법은 요즘은 흔한 '피켓 인사'였다. 차량 통행이 많은 지역에서 이름 석 자 쓰인 피켓을 들고 매일 1시간 반씩 인사했다. 이렇게 세 달을 보냈다.
반면 가장 큰 경쟁자였던 민주당 후보들은 당내 경선이 끝나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비교가 되며 지역 분위기가 바뀌었다. '저런 사람을 한 번 뽑아줘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처음으로 노동자 후보를 낸 조합원들도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에 임했다. 첫 선거의 결과는 1등 당선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에서 인사를 하던 그의 모습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들은 기억했다.
의원이 되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
백 의원은 당선 직후 혹시나 있을 청탁을 피하고자 주변 사람들과 밥 한 번 먹지 않았다. 선거운동을 도왔던 이들도 혹여 부담을 줄까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가 처음 찾아갔던 곳은 따로 있었다.
"건설노동자로 일할 때, 임금을 바로 지급하지 않고 어음으로 주던 관행을 바꿔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임금체불은 자주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원이 되고 제일 처음 찾아갔던 곳이 건설과였어요."
건설과 공무원과 마주한 자리, 시민들의 세금으로 발주한 공사에서 임금이 체불돼서야 되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무원들은 원청에 대한 관리감독만 하지 하청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발을 뺐다. 백 의원은 이를 시스템의 문제로 보고 소극적인 공직사회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조례들을 더하고 보완했다. 그렇게 12년을 이어왔다.
"일 시켜놓고 돈 안 주는 게 제일 나쁘죠. 공무원들의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시에서 발주한 공사뿐 아니라 민간에서 발생한 임금체불에도 적극 개입합니다. 체불임금과 관련해서는 공무원도 '우리 일'이라고 생각해요. 의정활동하며 제일 보람 있던 성과입니다."
노사갈등의 중재도 그가 자주 맡는 역할이다. 광양환경공사 갑질사건도 한 예다. 한 달을 넘게 천막농성을 이어오며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았는데, 그가 적극 개입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노동조합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인 그에게 신뢰를 갖고, 사측에서도 시의원의 중재에 귀를 기울였다.
"의원의 역할 중 하나가 사회 갈등의 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사 분쟁이 있을 때도 제도권에 있는 시장과 국회의원, 시의원들이 다 역할을 해야 하거든요. 서로의 주장이 팽팽한데 팔짱만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 아니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