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이정희
아침 방송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제는 기사님이 틀어주는 방송을 곁다리로 듣는 처지이지만, 그 전에는 아침이면 클래식 프로그램을 들었었다. 언제나 위로와 힐링의 '말씀'으로 넘쳐나던 시간,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변함없이 정감어린 목소리를 들려주는게 쉽기만 할까. 매일 듣노라면 때로는 피곤하고 때로는 묵직한 목소리의 감정이 미묘하게 전해지곤 했다. 저마다 사람들이 짊어진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혼자"라고 말하니 홀가분
'저녁은 아저씨랑 먹어?'
일 가르쳐주던 언니가 넌즈시 물어보았다. 늙수그레한 알바생의 신상이 궁금도 할 터이다. '저 혼자예요.' 덤덤하게 답해주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 어른들은 아버지가 외국에 계신다고 하라고 했었다.
나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아버지는 외국에 계셔'라고 내가 말을 했을 때 친구의 빤한 표정에 속이 켕겼다. 그래도 차마 내 입으로 '우리 부모님 이혼했어'라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런 '유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가정'을, '가족'을 부등켜안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그런데 뭐, 큰 아이가 25살 이후에는 굳이 '부모님'의 존재가 자기 삶에 주요 변수가 아니었다는 마당에, 이 나이에 혼자 좀 살면 어떤가.
'혼자예요',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말하고 보면 별 거 아닌 것을, 이 또한 해묵은 숙제를 푼 기분이었다. 작은 빵집에서 '소문'은 빨라 굳이 내가 만나는 이마다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는 빠르게 전해진 듯했다.
그 또한 이제는 연연할 일도 처지도 아니었다. 일하는 곳만이 아니다. 함께 작업을 하고 스터디를 하는 분들과도 내 상황의 변화를 전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이리저리 둘러대는 대신 그저 담백하게 '팩트'를 전했다.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어드밴티지'가 되었다. 누군가는 아직 '싱글'이라며 미소를 건넸고, 다른 누군가는 가장의 짐을 나눠져야 하는 처지에 대해 고민을 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짊어진 모성의 무게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이 없다며 토로했다.
나의 사연이 그 사람들 사이의 허들을 낮춘 것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살이의 틀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한다. 하지만 사는 게 어디 시험에 정답 맞추든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말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학교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 성적이 잘 나왔고, 인생도 그런 줄 알았다. 당시엔 국민학교를 나오고, 중고등학교를 가고, 다시 시험을 봐서 대학교를 갈 수 있듯이 인생도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이 있는 줄 알았고, 시험 공부하듯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저 사람이 아니면 결혼을 못할 거 같아서 겨우 스물 다섯에 줄행랑치듯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들 하듯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아이를 키우려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남들처럼 되지 않았다. 두 아이는 제 각각이었고, 남들처럼 키우기에는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부자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랑은 인연이 없었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백년해로를 하려니 했는데 이렇게 됐다.
마흔에 이혼을 하시고 여든 후반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평생 이혼을 했다는 족쇄로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저어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보면서 결심했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이제 홀로 된 내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엄마처럼 살지 않는 게 무엇일까'라고.
중고등학교 때 시험은 며칠씩 연달아 봤었다. 첫날 생각처럼 성적이 안나왔을 때, 선생님들은 말씀하신다. 지난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내일 시험 준비나 잘 하라고. 아쉽게 틀린 문제, 실수한 문제, 그 문제들이 나를 사로잡고 쉬이 놔주지 않는다. 엄마의 인생는 그런 거 아니었을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자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연연해 하는 엄마가 나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다.
인생의 시험지 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