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이성국 씨가 서산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작된 간첩혐의에 대해 재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기사
뉴시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과자라며 한탄한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고의 월북을 시도했다는 것은 여전히 유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후 8월 9일 고의 월북에 대해 재심을 신청한 춘천지방법원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 올해 납북귀환어부 문제가 공론화 된 뒤 춘천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한 사건 중 처음 심문이 열리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러한 심문기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성국씨 역시 매우 긴장한 모습으로 법원 청사에 들어섰다.
이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성국씨는 재판부를 향해 납북 귀환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의 폭력, 이후 지속적인 국가의 통제와 감시 피해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심문을 마치고 나온 후에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알 수는 없으나 국가를 향해 한 번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했다며 속이 후련하다는 그를 보며 이 재판 결과가 수천 명의 납북귀환어부 문제를 향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했다.
이성국씨의 고향은 부산 영도다. 그러나 2살 때 속초로 이사 왔기 때문에 부산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씨가 선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만 14세부터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동력선의 연안 배 선원으로 능숙하게 일해냈고, 그 점을 눈여겨보던 외조부가 자신이 기관장으로 있던 명성호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명성호는 오징어잡이 배로 연안이 아닌 먼바다까지 나가 조업하는 배였다.
나이가 어린 이씨는 선원으로 일하지 못하고 임시 선원인 '가고쟁이'로 외조부와 함께 배를 탔다고 한다. 운항 장비라고는 오직 컴퍼스(나침반)가 전부였던 명성호의 선장은 선박의 방향을 주로 산이나 지형을 살펴 파악했고, 항구마다 위치한 등대의 깜빡임 차이로 지역을 판별했다.
그런 명성호가 납북된 것은 이씨가 승선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는 선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우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나가보니 이미 북한 경비정이 딱 붙어 있더라고요. 어른들이 북한 경비정을 '까질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잠시 후에 총을 든 인민군들이 몇 명 올라오더라고요. 그리고 북한 경비정에 명성호를 밧줄로 엮어서 끌고 갔어요. 시동을 끄라고 해서 시동을 끄고, 나머지 선원들은 선실에 전부 있었어요. 우리가 그때 20명 이상 있었어요.
나는 기관실에 있어서 밖의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까질이'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명성호 스크루가 돌아갈 정도로 속도가 엄청 빨랐어요. 납북되던 날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북한 항구에 들어갈 때까지 몇 시간 걸려서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보니 거기가 장전항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이 든 선원 분 중에 이북에서 온 분들이 많아서 대번 장전항을 알더라고요."
납북된 뒤 다른 선원들과 함께 억류된 곳은 평양 근처의 석암휴양소라는 곳이었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외조부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외조부의 입원 치료는 1981년 서산경찰서 조사 때 특수지령을 받기 위해 공작교육을 받은 기간으로 조작되기까지 했다. 오래된 억류 생활과 외조부의 건강 악화에도 북한 군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과거 경력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신포 분이셨는데 한국전쟁 때 해군정보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아버지가 월남할 때 북쪽에서 막내 고모, 막냇삼촌이 남한으로 못 내려오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북에 억류되어 있을 때 아버지가 해군정보대에 근무했던 것이 탄로 나면 북한에 남아 있는 친척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가족관계를 숨겼어요. 결국 탄로가 났죠. 탄로 난 후에 북한 군인들이 추가로 집중 추궁을 했어요. 그 뒤로 저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남한으로의 귀환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누군가로부터 귀환한다는 말이 나온 뒤 곧바로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납북되었던 선박 7척이 함께 원산항을 출발해 속초로 돌아왔다고 한다. 속초, 고성 선적 5척 선원들은 속초시청 대회의실에 수감되었고, 탁성호 등 다른 지역 배 선원들은 시청 옆 건물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몸만 밖에 있을 뿐 감옥에 있는 것과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