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문인 1인 시위' 마지막 날인 4일 오후 서울시청앞에서 문인들이 모여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고 있다.
이종호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2000년 1월, 30여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민족자주와 독도주권 수호를 위한 연대회의' 결성 준비 모임에 이어 9월 수운회관에서 300여 명의 주비위원들이 모인 가운데 '한민족 독도찾기운동본부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서 그는 상임대표로 추대되고 독도방문단의 현장방문, 서울 장충단공원 집회 등을 주도했다.
이 무렵 박정희 추종자들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그의 기념관을 짓는다고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그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악연을 넘어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헌정을 파괴하면서 인권유린을 다반사로 자행한 독재자의 기념관 건립을, 그것도 국가가 2백억 원을 지출하고 서울시가 건설 부지를 제공한다는 것이어서 이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는 2001년 5월 4일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주관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1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한 특강에서 "박정희를 용서했느냐"는 질문에 답한다.
그러나 하여튼 다 풀었습니다. 박정희 씨에게 내가 제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은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다가 세 번, 네 번씩 전기고문을 해서 아버지가 반병신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뒤에 일을 못하셨는데 그것을 제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상, 이런 것보다도 박정희는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반드시 쓰러뜨리겠다고 맹세를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용서가 된 거죠. 그것으로써 끝났습니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