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쪽방촌 골목비좁은 길 양 옆으로 열악한 구조의 집들이 열을 지었다. 슬럼화한 작은 공간조직이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이영천
의자에 앉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시선이 무겁다. 골목 끝에 모인 노년의 몇 남자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 들어서면 차가운 시선이 먼저 날아온다.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 반응이다.
이곳은 대체로 불결하다. 때론 욕설과 싸움, 술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도심 속에 홀로 떠 있는 '섬'으로 여긴다. 나와는 다른, 못 배우고 가난하며 게으르고 문제가 많아 인생 막장에 다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취급한다. 그러면서 이 공간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더럽고 비참하면서 처량하지만, 가급적 찾아가면 안 되는 곳으로 취급한다. 이는 분명 낙인이다.
하지만 이곳은 섬도 낙인을 찍어야 할 대상도 아니다. 하나의 '촌락(村落)'으로, 다른 곳보다 오히려 훨씬 더 정감넘치게 살아간다. 우리가 잊고 살아 온, 가치와 전통을 잘 지켜내고 있는 농촌 마을이 도심 한복판에 재현된 듯하다. 향약이나 두레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똘똘 뭉쳐있다. 서로를 챙기고 정보를 공유하며 '빈곤한 평등사회'를 누리고 있다. 원시 공산사회가 이랬을까.
결코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이들은 단지 신체기능과 병환, 나이 등으로 사회 적응력과 경제 능력을 상실했을 뿐이다. 이게 이들을 바라보는 가장 적절한 시선이다. 나도 그랬다. 처음엔 낙인으로 바라보았으나, 비뚤어진 내 시선이 문제였지 이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겼다. 그다음엔 내 안의 부끄러움,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마음으로 이곳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종로 뒷길에 자리한 돈의동 쪽방촌에서 깨달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구경꾼 혹은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을 절감한다.
서종삼(徐鐘三) 이봉익(李鳳翼)
돈의동 쪽방촌이 있는 곳은 조선 시대엔 빈터였다는 게 중론이다. 재래식 연료에 의존하는 당시 땔감과 숯을 거래하는 '시탄(柴炭) 시장'을 1920년 12월 경성부가 개설한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그들 거류지 중심으로 공창(公娼)인 유곽(遊廓)을 들여온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 합법화한 공창이 전국으로 확산한다.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규모의 경제를 갖춰 급기야 집단화·산업화한다.
1930년대 후반 사창(私娼)마저 공창을 따라 집단화한다. 1936년 돈의동 시탄 시장이 폐쇄된 후 이 공터에도 사창이 생겨난다. 그 후 주변 요릿집과 카페, 주점 등 홍등가와 함께 시나브로 집단화한 것으로 추론한다. 1947년 공창이 폐지된 후, 이 공간조직은 소위 '서종삼 이봉익'이라 부르는 종로 3가 사창가 핵심으로 성장한다. 공창 폐지에 따른 풍선효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