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집의 <엘리제를 위하여> 악보명곡집에서는 5번(새끼손가락)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임승수
주지하다시피 새끼손가락은 힘이 약한 데다가 약지와 근육이 연결되어 있어 어지간히 훈련된 연주자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어렵다.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가 새끼손가락만 굽히려고 하면 약지가 같이 구부러지지 않는가.
명곡집처럼 새끼손가락(5)으로 시작하면 미-레#-미-레#를 5-4-5-4로 연주하는데, 피아노 초심자의 경우 고른 소리를 내기 어렵다. 새끼손가락이 담당하는 '미'는 소리가 작고 약지가 담당한 '레#'은 커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나기 십상이다.
헨레 악보에서 약지(4)로 연주하라고 지정한 이유는, 미-레#-미-레#를 4-3-4-3으로 연주해 서투른 연주자도 고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시 낭송에서 원하는 목소리 톤을 만들기 위해 턱 위치, 입 모양, 성대 근육 등을 알맞게 조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운지법(fingering)뿐만 아니라 템포나 음량도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다. 미-레#-미-레# 16분음표 네 개를 오차 없는 정확한 템포로 연주할까? 아니면 앞의 미-레#는 다소 느리게, 다음에 나오는 미-레#는 미세하게 템포를 올려볼까? 그러면서 깃털 세 개 정도 더 얹는 느낌으로 크레센도를 하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확장하다 보면 고작 네 개의 음을 연주하는 데도 수십 가지 방식이 나온다. 그렇게 템포와 음량을 미세하게 흔들면 듣는 이의 마음도 출렁이기 시작한다. 변화가 없는 곳에는 설렘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
악보에서 ②로 표기된 부분을 보자. 16분음표로 이루어진 분산화음이 나오데 손가락번호는 5-2-1-1-2-4-5 순서다. 앞의 5-2-1을 왼손이 담당하고 뒤의 1-2-4-5는 오른손이 담당한다. 이 분산화음을 별다른 고민 없이 누르면 십중팔구 5(새끼손가락)번이 담당하는 음은 약하고 1번(엄지) 음은 튄다.
그 결과 매끄럽게 흘러가야 할 분산화음이 자갈길을 달리는 마차처럼 불규칙적으로 튄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낭송(?)하는 초등학생의 모습이 겹쳐 보이지 않는가.
②를 매끄럽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내 연주 소리를 현미경 보듯 세심하게 들으며 각 손가락의 힘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새끼손가락은 힘을 더 주고 엄지손가락은 부드럽게 누르며, 상승하는 분산화음에 어울리도록 살포시 크레센도를 가미한다. 이 과정에서 초등학생 국어책 읽기 같던 분산화음은 아나운서의 맵시 있는 낭독으로 변모한다.
건성으로 치면 건성으로 들린다
목석 같은 연주를 하던 시절의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음표를 확인한 로봇이 손가락을 하강시켜 해당 건반을 누르듯, 일차원적 행동으로 일관했다.
이 행위를 통해서 유발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차원적인 결과물뿐이었다. 바로 단조로움. 내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세심하게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게 얼마나 단조로운지조차 몰랐으며, 그 한없는 둔감함이 '공대생처럼 치시네요'라는 감정 돋우는 댓글을 불렀다.
물론 과도한 감정 이입과 음량 및 템포의 변화는 난삽함만 초래해 음악적 흐름에서 개연성이 약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나 같은 방구석 연주자에게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감정적 절제가 아니라 리비도 대방출이다.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로 개인 레슨을 받을 때 선생님이 강조한 얘기가, 취미 연주자의 경우 '이렇게 느끼하게 쳐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장되게 연주해야 그나마 연주에 감정이 실린다고 했다. 동영상을 촬영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평소보다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연기해야 영상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감정이 풍부하게 살아나는 연주의 배후에는, 이렇듯 수면 밑 백조의 발길질과 같은 생고생이 숨어 있다.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이 글이 고된 고쳐쓰기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이다.
음표 하나하나에 시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정성을 담아 건반을 누르고(낭송하고), 설득력 있는 음향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건반과 페달을 탐구할 때만이 듣는 이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건성으로 치는데 건성으로 들리는 건 자명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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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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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를 위하여' 이렇게 치면 자동차 후진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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