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학년도 수능시험이 열린 지난해 11월 18일, 서울 중구 한 시험장에 입실한 수험생들에게 감독관들이 유의사항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진로나 진학과 관련해 아이들과 상담할 때 시쳇말로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가 있다. 교사의 말에 되레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비아냥거리는 아이도 나온다. 현실을 직시하고 맞춤 조언해주는 학원이 '공자님 말씀'만 되뇌는 학교보다 백 번 낫다는 당혹스러운 이야기도 실제 들었다.
'대학의 간판보다 학과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가 아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학벌의 위세가 예년 같지 않다는 말에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의치대를 제외하곤 전공 따윈 아무런 의미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인 서울'과 '지잡대' 사이에 전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과거처럼 동문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시대도 아닐뿐더러 학벌보다 전문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이들은 명문대 진학에 사활을 건다. 대학 입시 요강은 교과서보다 더 중요한 필독서다. 정작 중요한 개인별 적성과 흥미도 검사 결과는 뒷전이다.
대기업 CEO의 출신 대학과 취업률 추이 등의 통계 자료를 제시해도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믿을 수 없는 통계라며 고개를 가로젓는가 하면,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도 의미 없는 변화라고 일축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벌은 평생 못 바꾼다는 말까지 해댔다.
"명문대 진학과 '인 서울'에 목매단 이유가 선생님 세대와는 조금 다른 듯해요. 졸업 후 취업과 승진에 유리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에요. 적어도 제 또래에겐 명문대 출신이면 '위너'인 거고 '지잡대'를 나왔다면 그냥 '루저'인 거예요. '인 서울' 출신이면 누구를 만나든 꿀리지 않는 정도라는 뜻이고요."
아이들의 입에서 '위너'와 '루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걸 보고 놀랐다. 그들에겐 학벌 구조의 사회적 폐해를 성찰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따지고 보면, '인 서울'과 '지잡대'라는 혐오 표현도, 'SKY'와 '서성한중경외시'라는 서열 호칭도 모두 그들이 지어 부른 것이다.
한 아이는 영어로 SKY가 왜 하늘이라는 뜻인 줄 아느냐며 자문자답했다. 'SKY' 진학이 하늘의 별 따기라서 그렇다는 우스갯소리에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전국 모든 고등학교가 'SKY'를 하늘처럼 떠받든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SKY와 동의어가 '넘사벽'이라는 말이 참 씁쓸했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정은 '시험'... 사회적 배려 제도에도 비호의적인 이유
그래선지 아이들은 명문대 출신의 취업률이 낮은 걸 되레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명문대 출신이 대기업 CEO와 고위 공직을 독식하는 현실에 대해 발끈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정정당당하게 명문대에 합격했다면 그들에게 합당한 혜택이 주어지는 게 공정하다고 여긴다.
여기서 정정당당하다는 건 이른바 '부모 찬스' 없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한날한시에 한데 모여 같은 시험을 치른 뒤 당락을 결정짓는 시험만이 공정하고, 나머지는 '힘 있는' 부모가 개입할 여지가 커서 불공정하다고 본다. 수능과 공채에 대한 높은 지지가 이를 방증한다.
이는 그들이 대학 입시에서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과 지역 균형 선발 전형 등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사배충'과 '지균충'이라는 혐오 표현이 대학가에서 버젓이 회자되는 현실이다. 사회경제적 편차와 지역 차별을 보완하려는 노력조차 불공정한 '찬스'로 여기는 셈이다.
아이들은 시험이 '위너'가 되기 위한 유일한 통로여야 하며, 그 기회는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 기회란 물론 대학 입시다. 평생을 '위너'로 당당하게 사느냐, '루저'로 고개 숙인 채 사느냐가 나이 스물도 안 돼 결정되는 현실을 그들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지방대생들이 공공기관의 지역 인재 채용 비율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조차 마뜩잖게 여긴다. 대놓고 '루저들이 지질하게 군다'며 조롱하는 아이도 있다. 몇 해 전 정부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한다는 정책을 발표했을 때 압도적으로 반대 여론이 컸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언젠가 '대한민국은 서울대의 나라'라며 학벌 구조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한 아이는 도중에 말을 끊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꼬우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면 될 텐데, 괜히 부러우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닐까요?"라는 말이었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산업 구조와 사회의 변화를 고려하면, 학벌 구조가 완화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의 학벌 구조는 봉건시대의 신분제 못지않게 완고하다. 학벌 구조가 아이들을 대학 입시에 목매달게 하고, 명문대 진학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학벌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악순환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럴진대 아이들은 학벌 구조에 맞서기보다 '위너'가 되기 위해 무한경쟁도 불사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친구 중에 중도 포기자가 나와도 그들에게 손 내밀 여유가 없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한 아이의 카톡 상태 메시지에는 'Winner takes all(승자가 다 가져간다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 찬스' 논란 터진 정호영 장관 후보자... 아이들은 수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