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은 저마다 다르다.
권지성
둘째, 일과 여가입니다. 보사연의 행복연구에서는 행복의 조건에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을 질문에 포함하여 묻고 그 수준과 소득분위별로 각 조건의 우선순위를 매기도록 한 뒤 분석하였습니다.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도 항목에 포함되었습니다. '일'은 모든 소득분위에서 4위 안에 포함되었고, 최상위 소득계층에서는 돈보다 더 높은 순위를 보였지만, 대체로 가정과 건강, 돈에 밀렸습니다.
그리고 여기 은밀한 맥락이 있습니다. 저는 이전 기사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사연의 행복연구에서 70대, 60대, 40대, 30대, 20대 남성들과 인터뷰를 했는데요. 초기 질문으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행복 점수는 몇 점인가? 그 점수를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일'과 관련된 단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양적 연구의 설문조사처럼 '일'을 처음부터 문항에 넣어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해 당연히 답변을 해야 하기 때문에 표시가 되고 다른 항목들보다 우선순위가 높을 수 있지만, 아예 질문에 포함하지 않고 개방적으로 물어봤을 때는 일의 가치나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인터뷰의 후반에 일에 대해 직접 물어봤을 때도 일이 즐겁거나 의미가 있거나 그 때문에 행복하다는 답변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일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연구 참여자들에게도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하는 거지, 솔직히 즐거워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행복에 일은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습니까?
일은 우리의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요? 일단 일 자체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대체로 즐겁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을 느낄만한 것이라면, 행복의 요소들이 증가하고, 행복의 총량도 커질 것입니다. 일의 양과 질도 중요해 보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많은 일이 쌓이고 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며, 그에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심리적으로는 디스트레스를 받고, 신체적으로는 건강이 악화될 수 있으며, 여가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일의 의미를 잃어갈 수 있으며, 그 과정과 결과로 행복감은 매우 낮아질 것입니다. 또한 일에 대한 정해진 보상으로서 급여, 다른 말로 '소득'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일자리의 질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위에서 스쳐지나간 한 문장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상위계층에서는 돈보다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이 더 높은 순위를 보였다"는 문장입니다. 실제로는 최상위계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득분위가 올라갈수록 나타는 일종의 추세입니다. 그러니까 고소득자들은 돈보다 일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득이 높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 중에 하나는 '여가생활'의 우선순위가 매우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서 1순위를 물어봤을 때는 여가생활이 5위 정도에 머물렀지만, 2순위를 물어봤을 때는 거의 모든 소득계층이 여가생활을 1위로 꼽았습니다. 일과 여가는 '대체관계', 그러니까 일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많아지면 여가시간이 줄어들고,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족, 건강, 소득, 일과 여가가 모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최소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그 '가족'의 생계와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소득을 늘릴 생각으로 일을 너무 많이 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고, 여가시간이 줄어들면서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해집니다. 그러면서 가족과 관계도 멀어지거나 최소한 더 가까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소득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갖고 있는 '소비'에 영향을 미치며, 가족관계의 질, 그리고 건강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여가를 잘 활용한 사람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행복의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있고, 영향을 미치며, 순환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중심에 '일과 여가'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른이 된 이후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동과 청소년에게는 그것이 '학교'일 것입니다.
종교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신일까 복일까?
셋째, 종교입니다. 보사연의 행복연구에서 종교는 행복의 조건 중에서 매우 낮은 우선순위를 보였습니다.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들 중 일부는 종교생활을 제법 열심히 하며, 때로는 종교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거나 싸우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위 연구결과는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경우 일요일에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미사와 예배를 드리고, 그중 일부는 몇 시간을 더 머물면서 종교활동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맥락의 조각도 있습니다. 앞서 일에 대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질적 연구를 위한 인터뷰에서 행복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 30여명의 참여자들 중에서 종교를 언급한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었습니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말, 행복의 조건, 행복의 요소 등을 탐색한 것인데, 아무도 종교를 떠올리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절반 가까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나중에 종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았을 때만 자신에게는 종교도 중요하다는 진술이 나왔습니다.
저는 한 개신교단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고, 평생 개신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개신교에 대해서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종교생활은 개신교 신앙을 가진 사람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다른 종교들이 그러하듯이 개신교에서도 신의 명령이 중요합니다.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의 명령은 '야훼'로 알려진 신,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거기에 적힌 신과 영적 지도자들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그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을 존중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과 지인도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겠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웃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는 이런 명령을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원래' 구원과 축복을 받기 위해 또는 이미 구원과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명령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낯선 이웃들을 사랑하고 돕기 때문에 로마시대에 기독교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 돈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데 사용함으로써 신의 명령을 따르게 되며,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라고 불리는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이라고 하여 물질의 복을 구하는 기도를 권장하는 시대가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 있었습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게 해달라고, 남편이 추진하는 대규모사업의 계약이 체결되게 해달라고, 좋은 집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개신교인들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제가 알기로 그것은 개신교인답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런 복은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도 늘 원하는 것이니까요. 기독교인들은 뭔가 다른 걸 행복과 조건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자유와 평등: 멀고도 가까운 행복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