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닐 수거장 위치를 의논할 즈음 마을에 핀 벚꽃
노일영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려서 느릿느릿 간신히 잠에서 벗어났다. 부재중 전화는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문자와 카톡도 떼를 지어 자리를 잡은 터라 핸드폰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오전 7시도 안 됐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순간 전날 밤에 마을의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문자를 보낸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아뿔싸! 핸드폰이 이리도 무거워진 건 이장질을 그따위로 한다고 천산댁에게 쌍욕을 얻어먹고, 깡소주 2병을 최단 시간에 드링킹 하고, 이장을 그만두겠다는 문자를 날리고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문자와 카톡을 열어 보기가 두려웠다. 일단은 내가 주민들에게 보낸 문자를 먼저 확인해 봐야 했다. 맙소사, 너무나 유치찬란해서 초등학생이라도 마음에만 담고 있지 일기장에도 내색하지 않을 스토리였다.
불똥은 엉뚱하게 다락방에 있던 남편에게 튀었다.
"어제 이 문자 이거 내가 보여 줬지? 근데 왜 안 말렸어?"
"내 속이 다 시원하더구만, 뭐."
그래, 우리 남편 정도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남편에게 화풀이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전의를 곧바로 상실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화면에는 천산댁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하며 욕하는 스타일
"씨X, 노 이장! 동네에 왼갓(온갖) 잡꺼뜰(잡것들)이 새벽 오줌 싸기도 전에 내한테로 전화를 해가꼬 마을에서 당장에 나가뿌라 카네, 썩을거뜰. 요게 다 밴댕이 소갈딱지인 니 덕분인 기라. 이장질을 하다 보믄 욕묵는 기 당연한 거 아이가? 씨X, 그라고 내 욕은 욕이 아이라 대화의 뽀나스라꼬."
천산댁의 말은 20분이 넘게 이어졌다. 나는 네, 네, 하고 긍정의 추임새만 넣었다. 따지고 보면 천산댁이 하는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그녀의 욕설은 거친 세상에 내던져져 천신만고 끝에 기어코 세월을 돌파했다고 받은 트로피 혹은 기념패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미안하면 대개 머리를 긁적이거나 사과의 말을 건네는데, 천산댁은 미안해도 그냥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내뿜는 스타일이다. 아마도 그녀는 타인에게 주어진 세상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불평등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욕설로 자신을 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산댁이 버텨 온 세계에서 겸연쩍은 표정에 머리를 긁적이는 행위는 포식자에게 나약한 먹잇감이라고 신호를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장녀로 태어난 천산댁은 어렸을 때부터 동네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먹을거리를 얻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도시로 식모살이를 떠난 천산댁은 세 명의 동생이 결혼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늘 어금니를 악물고 함구하는 터라 천산댁이 그린 삶의 궤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끔 내뱉는 단서들을 통해 천산댁이 만들어 온 삶의 모양새를 대강 추론할 뿐이다.
아무튼 천산댁은 온갖 직업을 전전했고, 환갑을 한참 지나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서울 어딘가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건물 한 채가 있다는 말은 했지만, 남편과 자식에 관한 얘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다. 다만 아들에게 돈을 송금해야 한다며 농협까지 차를 좀 태워달라고 내게 몇 번 말한 적은 있다.
천산댁이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그녀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그래요, 아줌마. 내가 미안하다고, 시X!"
천산댁은 오랫동안 미친 듯이 깔깔거렸다. 그리고 그걸로 버스 승강장과 관련된 사건은 천산댁과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동네 주민들에게는 따로 뭔가를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한 성깔 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사실 이런 사건은 구구절절이 해명해서 이해를 시키는 것보다 그냥 시간이 삼켜버리도록 놔두는 게 오히려 더 나을 때도 있으니까···.
우리 동네에만 없는 폐비닐 수거장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밭에 작물을 심으려면 전해에 멀칭(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토양의 표면을 덮어주는 일)한 비닐을 걷어 내야 한다. 이제 곧 밭을 떠난 검은 비닐들이 마을과 하천 주변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이게 다 마을에 영농 폐비닐 수거장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숙원 사업을 조사한 결과, 많은 이들이 영농 폐비닐 수거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내 판단으론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시설물이 가장 시급했다. 강풍이 휘몰아치면 마을을 떠돌던 이 비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어딘가에서 썩지도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