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순창자수센터(현 순창군농업기술센터 건물 소재) 작품들(사진 제공-순창읍 조순엽). 최정님 씨는 ‘순창 자수’를 접목한 구슬 베개로 대구에서 성공을 거뒀다.
조순엽
한치 앞을 내다볼 없는 게 삶이다. 최씨는 어린 시절 순창에서 유명했던 '자수'를 익혔었다.
"남편 군대 가고 없을 때 순창에서 첫 애기 낳고 어느 날인가, 순창의 베개 딱지가 유명했잖아. 농업고등학교에서 자수 전시회가 있었어. 그때 동네 언니가 나보고 참가해 보라고 했어. 수를 놓는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내가 일등을 받았지 뭐야. 광주여고 다닐 때도 수예하고 가정 과목은 모두 100점을 맞았어. 내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좀 있었는가봐."
'순창 자수'는 대구에서의 삶에 전환점을 마련해 줬다. 최씨는 대구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인의 소개로 서문시장의 한 수예점에 자수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없이 사니까 돈벌이 되는 일은 뭐라도 하고 싶더라고. 한참 구슬 핸드백이 유행을 했어. 내가 구슬 핸드백을 만들다가, 베개 양쪽에 구슬을 달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때는 시집가면 원앙이 그려진 베개 몇 개씩 장만하고 그랬잖아. 구슬 베개를 어디서 구입을 하는가 알아봤어. 그러니까 서울 세운상가에서 가져오더라고. 남편하고 그걸 사려고 서울까지 갔었거든."
그가 만든 순창의 자수가 어우러진 구슬 베개는 대성공이었다.
"내가 구슬 베개 때문에 대구에서 수예점을 시작했어. 구슬 베개가 히트를 쳤어. 서울로도 올라가고, 대구에서는 없어서 못 팔았어 그때는. 이웃집 엄마들은 부업이 없어서 돈벌이가 안 됐는데, 내가 구슬 베개로 서문시장에 정착했지. 사람들이 나 보고 '인간승리'라고 그랬어. '전라도에서 온 색시가 구슬 베개로 대구에서 양옥집을 샀다'고."
순창과 대구에서 새겨온 85년 나이테
최씨는 형제자매와 함께 한 자리에서 말문이 제대로 트였다. 그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계속해서 떠났다. 6.25때 순창읍에서 피난 간 곳은 '순창군 유등면 쇠판리'로 기억했다. 최씨는 피난 이야기에서 '엄마 돼지'를 떠올렸다.
"그때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뱄어. 새끼를 낳으려고 하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피난을 못 가신 거지. 어머니가 유등 쇠판리까지 밥을 이고 찾아와. 우리를 살리려고. 내가 어머니 따라 집으로 가려고 하면 언니가 안 된다고 혼냈어. 산속에 오래 있었어. 그게 기억이 나."
최씨와 형제자매가 기억하는 소풍은 순창군 일대의 남산대 귀래정, 대모암, 헹가리, 강천산 등지였다. 모든 순창 사람들의 공통된 추억이 어린 소풍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