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격 직후의 이한열
네이선 밴, 이한열 기념사업회
6월 9일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범연세인들의 규탄대회가 전국 각 도시로 확산되었고, 국민운동본부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국민운동본부는 D데이를 6월 26일로 잡고 이날 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을 결정했다. 정부의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정부는 부분 계엄령 또는 위수령을 내리기 위해 군부대를 도시 외곽지대로 이동시켰다. 성남시 근방에 출동부대가 집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6일, 드디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학생ㆍ재야ㆍ야당ㆍ시민 등이 국민운동본부의 행동지침에 따라 탑골공원 일대ㆍ신세계백화점ㆍ시청 앞ㆍ광화문 등 7개 집결지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의 3중제지로 처음에는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오후 7시가 넘자 시민들이 가세하여 대규모 군중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국 33개 시와 4개 군에서 18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날 시위는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전개되어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시민 3,467명이 연행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ㆍ학생들은 '호헌철폐' 등의 구호에서 '민주쟁취', '독재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으로 격화되었다. 6ㆍ26대행진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최루탄에 쫓기면서도 시위대들은 '질서'를 외쳤다. 일부 방화와 파괴 그리고 투석전 등 과격양상을 띤 것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최루탄 난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