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메시지정신분석가 이승욱은 책 <마음의 문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너로 인해 내가 만족했다’는 메시지를 주지 않는 것은 자식이 떠날까 봐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부모도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에게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천승원
몇 년 전부터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도 며칠간 가슴을 쳤다. 벽에 머리를 들이받기도 했다. 다른 지인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이럴까 싶었다. 요청하지 않은 조언을 받을 때, 누군가 습관적으로 날 걱정하거나 가르칠 때. 순전히 내 낮은 자기효능감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심하게 불안해지고 분노가 올라오는 걸 어쩌지 못했다. 그건 '넌 부족한 사람이니까 누군가 채워줘야 해'라는 암시가 되어 평생 나를 어엿하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묶어두는 것만 같았다.
ADHD를 가진 존스홉킨스의대 소아정신과 지나영 교수는 ADHD아동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자존감을 타고 납니다. 뭉개지만 않으면 돼요." 아이의 관심사에 맞장구 쳐주고 긍정적 메시지를 주는 것이 자존감의 발판이 되며, 좀 내버려 둔다는 마음으로 키우는 게 좋다는 설명이다.
죄책감은 이중의 괴로움이 된다. 성인이 되어도 지속되는 과도한 잔소리에 저항할 때, 자식은 자신이 '나쁜 아이'라고 느낀다. "부모는 다 그래"라는 내리사랑의 고정관념과 "날 위한 건데"라는 효의 강박 사이에서, 자식은 자식이 되기 위해 자신을 잃는다. 남은 삶의 가장 중요한 밑천인 정서적 안정감, 자율성, 주도성을 잃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아버지의 인생을 연민했다. 나는 불화가 심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내가 어떤 영향을 받는 줄도 몰랐었다. 부모님 삶에 뚫린 구멍을 내가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었고, 자녀에게 도움이 되어 부모로서 얻는 존재감을 지켜드리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심리상담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거꾸로 됐네요. 아이가 어른을 보살피려고 한 것 같잖아요." '손 많이 가는, 나잇값 못하는 어른아이'라는 생각에 항상 부끄러웠는데, 나는 의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내 힘만으로 나에 대한 믿음을 키우기 어려워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평가 없이 '그렇구나' '그랬구나'라고 말해달라 부탁하기도 했고, 얼마 전엔 친구에게 이런 말도 해 봤다.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 듣고 싶은데, 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친구는 내 뜻을 정확히 알아듣고 공들여 말해 주었다.
지지와 수용의 과정
자식은 부모로부터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모두 흡수하며 자란다. 성인이 된 자식은 긍정적 영향을 이용해 부정적 영향을 스스로 지워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어느 정도 해냈을 때 진정 독립된 존재가 된다.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려 애쓰고 있는데 계속 같은 영향이 쌓여갈 때는, 한 개인으로서 사는 데 쓸 에너지가 위태해진다.
죄책감을 무릅쓰고 변화를 시도하는 건 자기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과정이다. 가능하다면 가족의 어떤 행동에 자신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는지 반복해서 전달해야 한다. 부모 자식의 관계가 10년간의 문제였다면 다시 10년은 조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로 10년 정도 걸렸다. 관계의 문제점을 수없이 호소하고도 그것이 가벼이 넘겨지고 잊히는 과정이 되풀이됐다.
지칠 대로 지쳤을 때, 그간 심리학 영상과 책을 통해 알게 된 것과 직접 느껴온 것을 A4 한 장으로 개괄해 어머니께 전송했다. 기대하진 않았는데 힘든 모습을 많이 보여서 그런지 잘 받아주셨고, 더 용기를 내 만화로 된 성인ADHD 안내서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문제 상황은 여전히 반복되곤 했지만, 부모님의 소통 방식도 조금씩 변했다(오늘 하루 집안 물건을 3개나 망가뜨렸지만 탓하지 않으셨다). 노력해주시는 데에 나도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