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심리학자 쉴리 우람 박사에 따르면 '우리 뇌는 겉으로 잘 드러나는 충격적인 경험과 은밀하고 사소하고 조용한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은밀하거나 불만에 찬 목소리, 웃음소리, 곁눈질, 들킨 듯한 표정 등은 나에게 정서적 플래시백(Emotional Flashback, 현재의 사소한 자극으로 과거의 괴로운 기억과 감정이 재현되는 현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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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란 그렇게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길을 걷다 외국어가 들리면 귀를 틀어막고 냅다 뛰었다. 일을 그만둔 후로도 몇 년간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방금 나와 대화한 사람들끼리 귓속말을 나눌 때, 모임에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테이블 분위기가 미묘할 때, 모르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흉볼 때, 어김없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아찔함을 다시 느꼈다.
일하는 동안 동료선생님들에게 고민을 에둘러 털어놓기도 했었다. 신기하게도 내 상태에 크게 공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희일비하는 나를 답답하게 보기도 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하기도 했다. 직장에서 치부를 드러낸 게 후회스러웠다.
그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수치스러움을 얘기하는 상황 자체가 낯설어서가 아니었을까. 수치심은 약점이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부끄러운 순간은 서둘러 회피했다. 겉으로뿐 아니라 내면에서도.
그런데 억누른 감정들은 하나하나 마음속에 남아, 작은 단서만 있어도 수시로 머리를 쳐든다. 일할 때는 내 기분 때문에 수업 분위기를 매번 망칠 수 없어 못 들은 척,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즐거움을 꾸며냈다. 울지 못하고 꿀꺽 삼킨 마음들이 병이 됐다. 내가 보내주지 않은 감정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브레네 브라운 박사는 책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방법들을 상세하게 제안한다. 첫 단계는 스스로 수치심을 인정하는 것. 수치심은 '자신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느낌'이며,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왜 그렇게 자신이 창피했을까. 첫 수치심의 흔적을 더듬었다. 유치원 때, 학예회에서 선보일 부채춤을 연습하는데 계속 혼자만 멍하니 있다 지적받던 기억. '나는 뭔가 다르구나' 했었다.
핸드폰에 수치심의 연대기를 적어 내려갔다. 날 예뻐하던 선생님이 심하게 무안을 준 순간, 사촌동생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순간, 한 어른이 날 만졌던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정신병자'란 말을 들은 순간, 썰렁한 농담으로 반 전체에 정적이 흐른 순간, 처음 보는 교수님이 후배들 앞에서 내 '맥락 없음'을 꾸짖은 때... 기억들은 같은 목소리를 냈다. "너는 부적절한 사람이야. 진짜 모습을 드러내선 안 돼."
대부분 나를 재단하는 타인의 기준을 성급히 내면화한 결과였다. 내향형 인간에게 강요되는 외향성, 부정확한 판단과 몸놀림 등 불완전함으로만 인식되는 지표들, 여성은 고분고분하면서도 신체적 자기결정권에서 빈틈없어야 한다는 이중잣대, 이성애 규범에서 벗어날 때 붙는 비정상이라는 꼬리표, 건강하지 못함을 드러낼 때 따라붙는 평가들, '학생들에게 휘둘리는 교사'라는 단정적 시선.
한 발만 잘못 떼면 수치였다(브레네 브라운 박사는 이를 '수치심 거미줄'이라고 표현한다). 옳음을 검증받지 않은 것들이 나를 틀린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일상 자체가 되어버린 이 현상에 대해 한 번도 터놓고 이야기한 경험이 없었다니. 이유는 간단하다.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나를 감추는 게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먼저 약해지기
앞담화를 듣고 돌아온 그날, 난생처음 타인에게 안겨 울었다. 숨죽여 흐느끼는 나를 그 사람은 말없이 토닥여 줬다. 친하긴커녕 서로 잘 몰랐지만, 등을 두드리는 손끝이 메트로놈처럼 느긋해서 부끄러움을 삭일 수 있었다.
소리 대신 공기로 전해진 말의 온도가 방치된 마음의 온도를 넘어섰다. '불완전한 건 틀린 게 아니에요. 너무나 당연해요. 나도 그렇거든요. 자기 존재를 의심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옳아요.' 내 마음엔 그렇게 들렸다.
수치심은 고립에서 나오고, 고립을 강화한다. 반대로 수치심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공감과 연민, 유대감이다. 자신에게 갖는 유대감은 취약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힘이 되고, 타인에 대한 유대감으로 확장된다. "사실은 나도", "그럴 만하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치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