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만주에서 첩자로 의심한 독립군 청년들 총격에 입은 총상으로 고개가 흔들리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 감.
국가보훈처
사진에서 보는 만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구부정하다. 나라 잃은 후 만주를 방문한다. 이때 김동삼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독립운동하는 청년들 의심으로 총격을 당한다. 이때 받은 총상에 머리가 흔들리는 장애를 평생 안고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만해의 사진은 늘 고개를 모로 틀고 있다.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비롯한 불교개혁 서적을 쉬지 않고 간행한다. 대중 강연도 이어간다. 7년 시간, 혼신 노력을 다한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오세암(五歲庵, 1917)에 든다. 자기 본성을 깨닫는(見性) 체험을 한다. 선사(禪師) 만해가 투사이자 지사(志士) 만해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듬해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대중불교와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선다.
이 힘이 3.1운동으로 이어진다. 때를 기다리던 지도자들이 민족자결주의에 힘을 얻는다.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뜻을 같이한다. 만해와 최린 등은 종교지도자 위주로 200명을 규합, 거국적 궐기로 독립선언을 구상한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유교가 중심이다. 일제 탄압으로 정치지도자들은 씨가 말랐다. 심지어 구 왕족과 대한제국 고위 관료, 친일파에 재력가까지 설득해 보지만 허사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직간접으로 관여한다. 여러 설들이 분분하나, 최남선 초(草) 일부를 뜯어고치고 '공약 3장'을 직접 추가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름도 올리지 못하는 최남선의 비겁에서 절대 공약 3장 같은 명문이 태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과정에서 '선언이냐 청원이냐'를 두고 이상재를 비롯한 개량주의자들과 마찰은 피할 수 없는 한계다.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33인 대표가 꾸려진다. 거창에서 합류하려던 유교 대표 곽면우는 불가항력을 만나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33인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태화관 모임에서 한 만해의 독립선언 연설은 민족사에 전환점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그곳에서 검거되어 재판을 받으며,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다. 형무소 생활은 고문을 비롯한 고난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