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무소 터의 현재 모습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서구 동대신동)
박기철
사라진 사람들의 운명
1950년 7월부터 형무소 당국은 육군방첩대(CIC)와 헌병대에게 재소자들을 인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소자들에 대한 진짜 정리, 즉 처형이 이뤄진다.
첫 번째 학살은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일어났다. 좌익사범들이 우선이었는데, 증언에 따르면 매일 밤마다 한 방에 수용돼 있던 사람들을 통째로 트럭에 태워서 갔다고 한다.
두 번째 학살은 8월 2일부터 3일, 양일 간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헌병대는 109명의 재소자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재소자의 손을 묶고 눈을 가린 다음 트럭에 태워 어딘가로 떠났다. 첫 번째 학살 때는 그래도 20년형 이상을 받은 재소자들을 가려서 데려갔다면 이번에는 감방 문을 열고 잡히는 데로 끌고 갔다. 이중에는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도 포함돼 있었다.
세 번째는 9월 25일에 일어났다. 앞서 이감됐다고 했던 1450명 중 943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트럭 한 대당 30~40명을 태운 다음 떠났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구덩이를 판 다음 끌고 간 사람들을 밀어 넣고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고 한다. 그리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다시 구덩이를 덮었고 빈 트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이감되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형무소 사건은 1500여 명이 희생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여기에 미확인 희생자까지 더한다면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이런 대규모 학살은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 금지령을 내리면서 겨우 중단됐다. 전쟁 초반 겁을 잔뜩 먹고 자국민까지도 적으로 간주해 학살 명령을 내렸던 대통령이 전세가 우세해지자 약간의 여유를 찾은 것이다. 만약 서울 수복이 늦어졌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 군사 고문단의 기록을 보면 한국군 3사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3500여 명을 학살하려고 시도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고문단이 인민군은 부산까지 오지 못할 것이고, 만약 진짜 학살을 저지른다면 UN감사단에 보고하겠다며 저지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인민군이 부산 외곽까지 밀고 온다면 형무소 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사살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들의 마지막 장소, 그리고 지워진 흔적들
부산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보도 연맹원들은 형무소와 부산 곳곳에서 살해된 후 매장되거나 버려졌다. 주요 장소로는 동매산(사하구 구평동)과 장산골짜기(해운대) 그리고 오륙도 해상 등이 있다.
부산형무소 옛 터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형무소와 관련된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장산골짜기 역시 해운대구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공사 당시 유골이 나왔지만 추가 조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고 해당 사건에 대한 어떠한 표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