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에 대한 불안ADHD 환자는 빈약한 주의통제력 때문에 정서적 단서를 잘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때때로 충동조절 부족 또는 불안 때문에 지나치게 편해 보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문제나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피상적이고, 무심하고,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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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없고 배려가 부족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항상 겁났다.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지?' '이런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리나?' '방금 또 눈치 없이 군 거 아냐?' 자기검열을 하다 보니 모든 게 하나하나 의심스러웠다. 눈치를 USB처럼 띡 꽂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할 수 있는 건 모든 눈치의 조각을 힘껏 끌어모으는 거였다.
그래서 '버전업' 된 나는 어딘가 딱딱하고 어색했다. 말 한 마디, 작은 몸짓, 찰나의 표정까지 내 안의 빅브라더에게 결제를 받곤 했다. 정도가 심할 때는 "네가 너무 조심스러우니까 나도 무슨 말을 못하겠잖아"라며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나에게도 중간이 있었으면 했다. 긴장을 풀면 멍해지고, 긴장하면 깡통로봇 같아지고. 사람이 왜 이리 극단적인가?(당시에 ADHD약을 먹을 수 있었다면 좀 나았겠다)
그래도 "생각을 하고 말을 꺼내야지" "넌 왜 이렇게 엉뚱한 소릴 잘하냐?"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덴 뭐 있지" 같은 말을 들으며 계속 망신 당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적절함을 위해 자연스러움을 포기한 셈이다. 재즈처럼 살며 생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해로 쌓아올린 돌무덤 밑에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한 ADHD인은 이런 상황에 대해 "폭탄을 안고 사는 느낌입니다"라고 표현했다.
과도한 자기검열의 부작용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무는 오랜 버릇이 있는데, 치과에서 "지금도 이가 많이 상했다"며 여러 번 지적받았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얼마 전 관련 책을 읽다가 이게 충동성과 과잉운동성, 불안을 억누르기 위한 강박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재미있는 일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이를 악 물고 살다니!
이런 자기검열에는 역효과가 있었다. 따져볼수록 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모든 인간관계가 모의고사 수리영역 같았다. 직관을 버리고 판단에만 의존하니 오히려 과장되거나 어색한 행동을 하기도 쉬웠다.
통제하자면 긴장해야 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심리학자 Young과 Bramham은 불안이 주의력 문제와 충동성을 증가시키고 합리적 추론 능력을 억제한다고 지적한다. 애초에 인지적 취약성을 가진 ADHD 환자가 불안과 공존하게 되면 "최대한 집중해야 할 때 ADHD 증상이 훨씬 더 두드러지곤 하기 때문에 '2배'로 인지장애를 겪는다"는 것이다.
불안하면 작업기억력도 약화된다. 작업기억 시스템이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할 때 일부 자원이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분위기 싸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내가 하던 얘기도 방금 들은 얘기도 자주 잊었다. 악성코드 잡으려고 깐 백신이 다른 프로그램 실행을 방해하고 자료도 멋대로 삭제하는 꼴이다.
이렇게 해서 부정적 결과가 늘면 '나는 부적절하고 멍청하다'는 역기능적 신념은 강화됐고, 머릿속 빅브라더는 외쳤다. "그래? 그렇다면 감시 체계를 강화해야겠군!!"
모든 사람에게 지나치게 조심하는 데 대한 보상심리일까? 가까운 사람들, 특히 애인과 얘기할 땐 필터가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정작 솔직해야 될 때는 상처가 될까 겁나 말을 못하는데, 평소엔 무심코 튀어나온 말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상처주었다. "그건 이런이런 맥락이었어"라는 설명을 납득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었다.
억울할 자격이 없다는 건 종종 슬프다. 하지만 요즘은 억울함도 슬픔도 재빨리 포기한다. 의도가 좋아도 표현 방식이 자기 위주였다면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게 그나마 챙기고 싶은 어른다움이니까. 가늘게 뜬 인자한 눈으로 나의 어리석음을 관조할 뿐이다. 그래, 네가 거기 그렇게 아직도 있구나.
이번 생에 눈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