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면사무소 이장회의서류
노일영
다소 과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장의 직무라는 것이 꽤 중요한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장은 주민들을 위한 봉사직인데,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정보를 많이 제공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021년 1월 5일에 처음으로 이장 회의에 참석했다. 함양군의 경우 2주에 한 번 이장 회의가 열린다. 어쨌든 백전면 16개 마을의 이장들이 참석하는 회의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만들어 놓은 '이장회의서류'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회의에서 나는 28개나 되는 회의 안건을 보며 기겁했다. 연초라서 사업 신청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더구나 회의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생소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춘파용 맥류 보급종 신청 안내' 같은 안건은 내게 해독이 불가능한 외계어나 마찬가지였다. 면사무소의 산업경제담당 공무원이 차근차근 해석을 해줬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질문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눈만 끔뻑거리기만 했다.
보조사업 신청 안건으로 넘어가자 숨이 턱 막혔다. 보조사업은 국비, 경남도비, 군비 등 세금이 보조금으로 투입되는 사업인데, 자부담 비율은 사업의 종류에 따라 상이하다. 어쨌거나 첫 번째 이장 회의에서 언급된 보조사업만 해도 6개였다.
친환경농업분야 보조사업, 쌀 생산분야 보조사업, 곶감분야 보조사업, 원예분야 보조사업, 과수분야 보조사업, 양봉분야 보조사업. 서류를 읽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보조사업에 관련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조사업 관련 설명이 끝난 뒤에는 '공공비축미곡' 등급별 매입가격에 관한 발표가 있었고, 이어서 '축사시설현대화사업' 안내 및 접수에 관한 소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귀농한 지 7년이 되었지만, 내가 과연 농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산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마을로 돌아가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행정 통계를 위해 주민들이 기르고 있는 소, 돼지, 닭, 염소 등 총 21종의 가축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가구를 조사해서 주택화재보험에 가입했는지를 파악하고, 미가입 주민들에게 보험에 가입하라고 홍보를 해야 했다.
회의 시작 전에 받은 이장 임명장을 면사무소 구석에다 슬그머니 버리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왜 귀농을 했는가? 조용하게 농사지으면서 바쁘지 않게 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 아닌가. 그런데 남편의 꾐에 빠져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내 몸은 회의실 의자에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세계
"아이고, 노 이장. 축하하네! 나는 돌아가신 자네 부친의 후배 조 이장이라고 하네, 귀향한 지는 한 15년 정도 됐지. 아무튼 반갑구만. 아버님 뒤를 이어 이장이 되었으니 주민들의 기대가 참 크겠네, 그러니 자네도 부담이 클 거고."
면사무소 회의실에는 나와 조 이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사무실로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업을 신청하러 간 것이 아닌가 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내 마음과 달리 반달 눈웃음으로 추측하건대 마스크 속 조 이장의 입꼬리는 시원하게 올라가 있는 듯했다.
"오늘 처음이라 뭔 소리 하는지 잘 모를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봄여름가을겨울 한 바퀴만 돌고 나면, 회의에서 나오는 얘기 다 알아먹게 되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고. 아무튼 이장 업무란 게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일이 거의 없는 거고. 하려고 작정하면, 엄청나게 할 일이 많다는 것만 명심하게. 명예직 이장이 될지 봉사직 이장이 될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거니까."
조 이장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이장회의서류'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서 그 사업에 관해 신청을 받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