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림(1873-1928)
미상(저작권해제)
만주에 있는 우리 백만 동포가 불행히 중국 관헌에게 쫓김을 당해 지금 마치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참담한 정경 가운데 있는 것은 이미 신문 지상으로 보아서 아시려니와 그 사실의 진경(眞境)을 금반 경성에서 개최된 재정위원회(財政委員會)에 직접 보고한 만주지역 감리사 배형식(監理司 裵亨湜) 씨의 말을 들은즉 우리는 뼈가 저리고 눈물이 앞을 가리게 됩니다.…(중략)… 우리는 이것을 잠시라도 참을 수가 없어 긴급히 금반 재정위원회로 모인 것을 기회로 하여 임시 재만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중략)… 하늘을 우러러 부르짓는 가련한 동포의 애끓는 소리를 모든 형제자매에게 전하여 우리의 동포애와 인류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들어내도록 열성으로 찬성해 주심을 절망(切望)하나이다. (주석 14)
국내의 민족운동 세력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지 않았다.
1927년 12월 9일 조선교육회관에서 신간회가 중심이 되고 각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 안재홍을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박동완과 윤치호가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다.
박동완은 현지 조사를 위해 특파원 자격으로 이도원과 함께 1월 17일 열차편으로 안동현, 봉천, 장춘, 길림, 하얼빈, 해림 등 각 지방을 답사하였다. 봉천에서는 만주조선인대회 상무집행위원들과 회견하고 중국 책임 당국과 각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야만적인 조선인 학대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2월 7일 무사히 귀환한 박동완과 이도원은 13일 수표교 회관에서 보고대회를 열고 그간의 활동 상황과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의 언론보도이다.
시내 수표정에 있는 재만동포옹호동맹에서는 13일 오후 4시 반에 그 회관 안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만주특파원 박동완, 이도원 양씨의 조사한 보고를 들은 후 다음과 같은 모든 사항을 협의 또는 결의를 하였다더라.
-. 만주조선인 문제는 객년에 비하여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금후 항상 곤란한 문제가 지속될 것으로 인함.
-. 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은 기정한 중국입적 기회의 방침에 의하여 하되 상무위원회에서 필요한 방법은 강구하여 적의한 기회에 부회에 제안케 함.
-. 동정금은 00수집하되 그의 처치(處置)는 아직 보유함.
-. 본 동맹은 지방동맹과 구별하기 위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중앙부'로 칭하고 전조선 통일적 민활을 기함. (주석 15)
박동완은 일제와 만주군벌의 합작으로 재만동포들의 위기를 구출하고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지 조사를 다녀오는 등 당시 국내의 민족운동가 누구 못지 않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총독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고 뒤쫓는 시선이 많아졌다.
주석
14> <기독신보>, 1927년 12월 21일.
15> <중외일보>, 1928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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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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