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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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은 여러 개의 필명으로 <신생명>에 많은 글을 썼다.
교회와 기독교신앙에 대한 계몽주의적 논설 뿐만 아니라 무기력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원해낼 수 있는 각종 시론을 집필했다. <그리스도의 종교와 우리의 사명>(제20호)에서는 "우리는 시대문명에는 뒤졌으나 영적 신앙에서는 결코 앞서나가는 민족"이라 하고, 제4호의 시론 <계급투쟁과 사회진화>에서는 자본주의와 계급투쟁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일어나는 사회투쟁은 서로 호조(互助)하는 정신과 사회봉사의 근로적 정신이 일어나서 자본주의자는 사리와 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조직을 변경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써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진실로 이타주의의 상애정신(相愛情神)이 내칙으로부터 진인간성(眞人間性)을 발군할진대 사회에는 계급투쟁가 없는 이상적 새 사회를 이룸에 이를 것이라 하노라. (주석 8)
그의 민족의식은 식을 줄을 몰랐다.
감리교 감독 웰치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자들에게 한국은 독립사상을 포기하였으며, 조선은 점차 안정되어 물질적으로 향상되는 중이오, 지금은 그전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1924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마치 1908년 대한제국 외부 고문 스티븐스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미화하는 발언과 유사한 내용이었다. 그는 장인환ㆍ전명운 두 의사에 의해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역에서 처단되었다.
박동완은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기독교의 감독이란 자의 저급한 발언에 국민의 분기가 터지고 청년회를 대표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와 관련 언론보도이다.
야소교 북감리교 감독 미국인 웰치박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기자에게 조선사람들이 지금은 독립사상도 없으며 안온한 상태로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는 실언문제에 대하여 경성에 있는 그 교회 엡윗청년회 대표자들이 제작일에 시내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서 그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는 것은 재작지에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 그에 의한 내용을 소개하건대 지난달 21밤에도 역시 그들이 청년회에 모이어서 토의한 결과의 우선 실언문제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본 뒤라야 처리방침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웰치 씨에게 직접 전보를 띄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결의한 후,
정동 엡윗청년회 대표 박동완 씨의 명의로 뉴욕에 있는 웰치 씨의 집으로 전보를 띄웠던 바 델라스란 곳에서 지난 30일에 정동 노불목사를 경유하여 박동완 씨에 도착한 씨의 대답인 암호전보에는 신문은 거짓말이다 나중에 편지로 자세한 것을 기별하겠다는 의미였음으로 설사 이 말이 신용할만하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그러한 헛소문이 났느냐는 것을 조사할 필요도 있음으로 어떠하든지 웰치 씨의 편지가 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모여 의논하기로 결정하고 헤어졌는데 당일에 모인 각 대표는 정동 예배당의 박동완 씨를 비롯한 중앙, 동대문 등 세 예배당의 대표 각각 두 사람씩 참석하였다. (주석 9)
박동완에게 웰치가 보내온 편지를 <기독신보>가 그대로 보도하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판매 금지되었다. 일제가 국제여론을 의식해서 웰치의 발언을 왜곡한 것이다.
박동완은 웰치감독 사건과 관련 <신생명>에 쓴 글에서 "웰치감독의 실언문제는 다시 문제될 것이 없음은 이미 각 신문을 통해 보도하였으나 웰치의 답변이 게재되었던 신문을 당국에서 다 압수하여 일반이 확지하지 못하고 매몰되어 버렸음은 유감"이라고 밝혔으며, 일제 당국의 의도적인 모함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주석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