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년 '3.1독립선언서'. 왼쪽 끝에 서명자 33명의 명단이 보인다.
33인유족회
특히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와 별도로 제작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행사를 마친 동포들은 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들에게 일제는 내란죄로 엮어 중형을 선고하고자 시도하면서 일체의 가족면회를 금지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책임자 이종일의 주도로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인쇄 도중에 총독부의 한인 형사가 들어와 적발될 위기에 처했으나 손병희가 거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보성사는 또 <조선독립신문> 제1호 1만부를 찍어 3월 1일 서울시내에 살포하는 등 몇 차례 지하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곧 가정부(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지하신문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곳곳에서 제작되어 만세시위와 함께 살포되었다. 태화관과 보성사는 얼마 후 의문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기미년 만세시위는 어느날 갑자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거사가 아니었다. 동학혁명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의병투쟁ㆍ신민회 등 국내의 민족운동과 1917년 7월 해외독립운동가 14인의 '대동단결선언', 1919년 초 해외독립운동가 39인의 '대한독립선언', 같은 무렵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국내 파견,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 그리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역사의 맥락과 조직 그리고 국제환경을 포착하여 이루어진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만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임규와 안세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각 및 의회에 독립선언서를 제출케 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원조 청원서 등을 영문으로 번역, 전송키 위해 현순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민족대표들이 재판정에서 판검사의 심문에 "독립된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였음을 진술한 것으로 보아, 독립이 되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기로 사전에 뜻을 모았던 것 같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데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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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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