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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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측은 이미 손병희 등 15인이 선정되었고, 기독교 측은 2월 27일 이승훈의 주도로 박희도ㆍ이갑성ㆍ오화영ㆍ최성모ㆍ이필주ㆍ함태영ㆍ김창준ㆍ신석구ㆍ박동완 등 10인이 이필주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 중 함태영은 서명자들이 구속될 것에 대비,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제외하고, 신흥식ㆍ 양전백ㆍ이명룡ㆍ길선주ㆍ유여대ㆍ김병조ㆍ정춘수 등 7인을 다시 교섭하여 모두 16인의 민족대표가 선정되었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일부터 각지의 승려들에게 독립선언 준비 사실을 극비리에 알리면서 서명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나 해인사의 백용성만이 서명했을 뿐이었다.
유림측은 향리 성주에 있는 김창숙에게 전갈이 갔으나 마침 모친의 병환으로 2월 27일경 상경했을 때는 서명자가 이미 결정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에 들어감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겼다. 김창숙은 이후 유림을 동원하여 <파리장서> 등 별도의 독립운동을 폈다.
독립선언의 준비를 맡은 최린 등은 선언서의 기초를 최남선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상순 최남선은 "일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 문건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 데 그 작성책임은 형(최린-필자)이 져야 한다"고 하면서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나는 육당의 충정과 처지에 동정하여 이를 승락하고 속히 기초할 것을 부탁하였다." (주석 4)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광수 등과 사귀면서 서구문학 작품을 탐독했다. 귀국 후 도서출판 신문관을 창설, 잡지 <소년> 등을 발행하면서 근대문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제1가는 문인ㆍ문필가로 문명을 날렸다. 독립선언서를 쓰게 된 배경이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쓰는 영광을 차지하고도 후일 변절하여 오명을 역사에 남겼다. 독립선언 준비에 크게 기여한 최린도 비슷한 길을 걸어 초심을 잃었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린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람에게 독립선언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고, 자신이 집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바뀌지 않았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말미에 <공약3장>을 추가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 그리고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와 파리강화회의 열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도맡아 집필하였다.
주석
1> 한규무, <이승훈>, 126쪽, 2008, 역사공간.
2> 전택부, 앞의 책, 328쪽.
3> 한규무, 앞의 책과 같음.
4> 최린, <여암문집(如菴文集)> 하권, 192쪽, 여암문집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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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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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 이승훈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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