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빨간 목도리를 들고 청년들과 대선 승리 기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상황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정치엘리트와 유권자 차원의 정파적 양극화의 심화와 이로부터 파생된 사회갈등을 조정, 관리해야 하는 정당들의 무능이 자리하고 있다. "정파적 양극화"라는 용어로 표상되는 현시점 정치과정의 분열은 정당을 축으로 한 정파적 분열과 이에 영향받은 유권자층의 분열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 다원성을 토대로 한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까닭에 나타났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대통령제와 양당제라는 우리와 비슷한 권력구조를 가진 미국에서 이미 목도된 바 있다. 2016년 선거에서 아웃사이더를 표방한 트럼프와 샌더스가 정당의 경선과정에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고, 본 선거에서 트럼프가 오랜 공직 경험을 가진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강성 지지자들을 등에 업은 트럼프에 의해 장악된 공화당은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의 선거를 거치면서 더욱 정파적인 의원들로 구성되었고, 그 결과 사회분열과 갈등을 의회 내에서의 정당 간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는 목소리는 크게 약화되었다. 정파적 양극화는 트럼프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불신으로 결합되어 현안해결을 위한 생산적인 논의는 그의 임기 내내 거의 불가능했다. 지지와 불신임 간의 세력대결은 선거 이후에도 이어졌고, 급기야는 2020년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트럼프 지지시위대들에 의해 미국의 국회의사당이 폭력적으로 점거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우리의 경우에도 정파적 양극화는 더이상 새롭지 않다. 국회 내 정당 간 이념양극화의 심화는 이미 여러 경험적인 연구들을 통해 입증되었고, 유권자 차원에서의 정서적 양극화 역시 그 영향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유권자 차원의 양극화 심화는 유권자들의 정책적인 현안과 정치적 대상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유권자들은 지지정당에 따라 같은 사안에 대해서 더욱 극단적으로 다른 이해와 의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 대상에 대한 평가 역시 정파성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네트워크의 확산으로 인해 그 심각성이 배가되었다. 유권자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일상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들을 갖고 있어 정치적 의사교환을 위한 목적으로 더이상 정당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등 새로운 미디어의 일상화는 유권자들에게 의사표현과 교환의 손쉬운 수단이 되었고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소통을 이전보다 광범위하게 확산시켰다.
문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정치적인 논의의 장이 크게 늘어나고 정치참여가 이전보다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생산성 있는 결론에 이르기보다는 선택적인 정보의 취사선택과 배제로 인해 정치적인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온라인 매체를 통해 목도되는 것처럼 심화된 정파적 양극화 속에서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한 여론의 조정과 결집은 정치적 조정과정을 원칙이나 정책이 아닌 맹목적인 신념의 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더욱이 사안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해석보다는 무책임한 "편파중계"를 통해 일방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유튜브 채널들의 부정적인 역할은 이전보다 더욱 커지고 있다. 일상적인 정치과정이 논의와 합의의 과정이 아닌 감정적인 대결의 장으로 변모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유권자 차원의 양극화 심화는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팬덤정치"로 이어지고 있다. "팬덤"은 특정인에 자신을 투영하여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좋아하는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적 영역에서의 "팬덤"은 그 자체로 부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공적 성격을 지닌 정치의 영역으로 전이될 때 그것이 가져오는 폐해는 실로 크다. 팬덤정치로 인한 맹목적인 지지와 불신에 근거한 갈등은 모든 사안을 '우리'와 '적대적인 상대방'으로 나누어 인식토록 함으로써 견해를 달리하는 개인들 간의 소통을 어렵게 한다. 게다가 팬덤정치적 상황은 개인들에게 약속된 제도와 절차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라도 그것이 스스로의 입장과 다른 경우에는 이에 대한 승복을 자신의 존재감 부정으로 인식시키며, 정치적 대상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한 합의와 양보가 더욱 요원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정치적 양극화와 이로부터 파생된 팬덤정치는 공적 영역에서의 갈등을 사적인 것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이의 폭발성과 파괴력을 더욱 증폭시켜 공동체의 갈등조정능력을 크게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상황은 팬덤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전환기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고민, 중앙정치에 휩쓸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지방자치, 양극화로 인한 국회 내 다원성 문제, 과도한 규제로 발이 묶여 있는 시민권, 경제불황과 불평등, 산업혁명에 준하는 변화에 따른 노동문제에 대한 대처, 세대와 성별 간 갈등문제 등 촛불과 함께 전면적으로 제기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현안들은 탄핵 이후에도 여전히 진전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현안에 대한 정치권력의 대처방식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조정, 관리하기보다는 전면적인 대결을 통한 갈등의 심화에 가깝다. 게다가 팬데믹 상황으로 인한 정부 기능의 강화 속에서 시민들의 권리는 한층 더 제약되고 있음에도 이에 관한 정치권의 생산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