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식 모습( 1921년 1월 1일)
심규상
또 임시의정원 상임의원을 맡았다. 그는 상임의원을 사임한 이후에는 중국의 무관학교(운남군관학교)에 입학해 무장활동을 통한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독립운동 중 병을 얻은 그는 고향인 대전으로 귀향해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하다 1924년 체포됐다.
이후 김용원 선생의 옥살이를 살펴보면 일경이 얼마나 선생을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이 재발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병세가 좋아지자 안동지방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독립운동을 꾀했다. 그러자 일제는 1927년 1월 형집행정지를 취소하고 다시 체포, 공주형무소에 구속했다. 이후 강도교사죄를 추가해 2년 6개월로 형량을 늘렸다.
선생은 감옥 생활 중 다시 병이 재발했다. 이에 일제는 1927년 3월 병보석으로 석방했으나, 감시를 철저히 했다. 병이 조금 나아지자 1928년 11월 또다시 체포됐다. 이후 압송되던 중 일경을 때려눕힌 후 탈출했다. 논산에서 은신하며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본 경찰의 습격으로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선생은 수감된 지 5년 2개월 만인 1934년 2월에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하지만 그해 6월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용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전지역 내 상징적인 그의 독립운동사는 '짝퉁' 독립 운동가를 양산하기도 했다.
선생의 애초 묘소는 고향인 대전 서구 원정동 선산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덕군수가 새겨 만든 선생의 묘소 앞 공적비의 비문 원판을 누군가 통째로 떼어내 공적 내용에 '이돈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추가해 설치했다. 김용원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공적 내용을 뒤 바꾼 것이다. 이돈직은 당시 계룡건설 이인구 명예회장의 조부로 독립운동 행적이 증명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결국 이돈직 기념비 등은 모두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