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평화공원에 안치된 4.3 희생자들의 비
김순애
잇달아 막내와 큰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더 이상 피난가지 않고 자수를 선택했다. 우리 가족의 경로는 '습궤'에 있었던 대다수 동네사람들과 달랐는데 자수하러 가는 곳도 동네사람들이 갔던 곳과는 달랐다. 여러 가지 정보를 모은 끝에 아버지는 경찰에 친척이 있다는 누군가를 찾아갔고 거기서 자수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자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 가족을 둘러싼 삶의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 곳 저 곳으로 자주 옮겨졌고 가는 곳마다 아버지는 '산에 어떻게 올라가게 됐는지, 혹은 누가 주동했는지' 등을 추궁 당하며 모진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엄마와 우리 남매들은 오빠와 막내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속절없이 들어야만 했다.
수용소로 끌려간 언니
결국 몇 번의 고문을 받으며 옮겨 다니던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가게 된 곳은 동부두의 주정공장이었다. 고구마를 가공하던 공장이라고 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컸다. 하지만 그 넓은 공장도 산에서 내려온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남자, 여자, 부상자, 아이, 어른, 임산부 등이 모두 뒤섞여 한 창고에 수용되어 몇 달을 견뎌야 했다.
수용된 이들 상당수가 피난 생활과 도피 생활 중 가족의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에 지긋지긋한 공포를 피해 자수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지막지한 고문과 취조였다. 끔찍한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지만 그들 중 조리 있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열다섯 살이 넘는 모든 이들이 취조를 당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두서없는 진술 속에 더 큰 고문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의 언니 역시 그렇게 해서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 중 하나였다. 오빠와 막내 동생에 이어 언니까지 우리 가족의 모습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