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당시 태극기가 펼쳐진 서울의 한 거리.6월 항쟁 당시 태극기가 펼쳐진 서울의 한 거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이 신당을 창당하는 데는 여러 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용호상박전을 벌인 이래 김대중은 박정희의 '공적 제1호'로 찍힐만큼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출신지역은 산업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수많은 인재들이 정부와 산하기관에서 홀대당했다. 10ㆍ26사태로 독재자가 사라진 뒤에 나타난 전두환 5공 신군부는 이를 그대로, 더 악독하게 이어받고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저질렀다.
그 시기 군부독재와 유착해온 족벌신문과 공영방송은 김대중과 재야민주인사들을 적대시하였고, 기업ㆍ학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김없이 좌파ㆍ용공ㆍ빨갱이의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사회가 중세보다 더 두꺼운 암흑의 커텐을 제치고 이성과 양식이 회복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언론도 차츰 자율성을 회복해 나갔다. 김대중에 대한 인식과 평가, 재야민주인사들의 희생과 헌신도 알려지게 되었다. 유신과 5공에 맞섰던 청년학생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납치ㆍ수장ㆍ사형선고ㆍ투옥ㆍ망명ㆍ연금으로 점철된 그의 족적을 살피게 되고 평가하였다. 지금과 같지는 않지만, 대선을 앞둔 1987년에도 종종 모의투표와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4명의 대선후보 중 그가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의투표 및 여론조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