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 총선 선거 결과. (위키피디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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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 예상 외의 승리를 거두고 두 김씨가 공동대표를 맡게 된 제2기가 민추협으로서는 가장 활기넘친 전성시대였다. 제2기 출범을 계기로 전국에 시도지부를 결성키로 하고, 60여 명이던 운영위원도 250여 명으로 늘리고, 회원 총수도 1,50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힘의 추는 서서히 원내 기반이 있는 신민당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민추협의 두 공동의장은 총선 후 신민당을 방문하여 당선자들을 격려하고 이민우 총재와 3자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향후 정국 운영과 개헌추진방향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2ㆍ12총선 뒤 첫 3ㆍ1절 66주년을 맞아 두 공동대표는 "현 정권당국이나 집권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고 겸허하게 수렴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고 말하고 "우리는 앞으로 재야 민주역량과 국민ㆍ학생과 노동자ㆍ농민의 민주적 창의를 하나로 집결하는데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라고 결속과 투쟁을 다짐했다.
1985년 5월 24일 서울시내 5개 대학생 75명이 서울 을지로입구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2층 도서관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에 미국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두 공동의장은 긴급회동을 갖고 학생들의 주장이 국민의 요구와 같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미우호와 민족적 자존심이 해쳐지지 않도록 신속하고 평화적으로 수습되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추협은 변호인단을 구성하는 등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정부는 이해 8월 학원안정법 시안을 발표하여 학원탄압을 강화시키려 했다. 학생들은 물론 민추협ㆍ신민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강압적으로 나왔다. 학생시위가 계속되고 노동자들의 분신사태가 잇따랐다. 8월에는 광주에서 홍기일, 10월에는 송광영씨가 분신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고려대학에서 개최된 전학련 주최 범국민시국대토론회의 방문과 관련하여 박찬종ㆍ김병오ㆍ한광옥 의원 등 민추협 간부 7명이 검찰조사를 받고 불구속 기소되고, 박찬종 의원은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했다.
기관지 <민주통신>의 제작 관계자들이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용공조작 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추협은 신민당ㆍ재야ㆍ종교계와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농성을 벌였다.
신민당은 8월 2일 임시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주류가 미는 이민우 후보와 비주류의 김재광 후보가 맞붙어 471표 대 354표로 이총재가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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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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