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설아
파양을 결정한 가정의 마무리 상담을 몇 차례 진행한 적이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멀어진 상태였던 터라 가족의 회복을 위한 상담이 아닌 아이를 위해 어떻게 잘 이별할 것인가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아이와 버티는 동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뒷목을 잡고 쓰러질 듯 혈압이 오르내리던 부모의 모습이 막상 아이를 돌려보낸다는 결정 앞에 서자 한결 차분해 보였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결국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아이가 상처를 최소로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상황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나를 포함한 모든 어른이 작은 아이 앞에서 부끄러움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생부모와의 분리를 한번 겪고 입양가정을 만난 아이들에게 닥치는 이런 이별은 치명적일 수 있다. 아직 어린 나이이다 보니 이 모든 슬픔과 상실을 감당하기 쉽지 않아 깊숙이 억압해 버릴 뿐, 아이 안의 신뢰 체계는 와르르 무너지는 중이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으며, 나의 생존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신념이 더 공고해져 아이는 누구와도 깊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을 건네고 싶어 입양했던 아이가 사랑에 가장 무능한 상태가 되어 방출되는 잔인한 결말이 여기에 있다.
내가 마지막 이별 상담을 했던 가정의 아이는 입양 이전에 자신이 살았던 보육원으로 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이가 살던 가정의 행정구역을 넘어선 타지역에 있던 곳이라 판사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다.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해 판사에게 제출할 전문가 소견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한 자, 한 자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소견서를 썼다. 심각한 외상을 입은 이 아이가 그나마 익숙한 고향으로 돌아가 치유할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인 우리가 건넬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가 아닐지 판사님의 자애로운 판결을 부탁드린다고 써 보냈다.
한 달 후쯤 '선생님, 오늘 파양 판결받았어요. 그리고 아이는 원래 있던 OO원으로 돌아갔어요'라는 입양엄마의 문자를 받았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정말 이렇게 끝이 났구나. 아이와 가족은 다시 남남으로 돌아가 다른 하늘 아래 살아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삶이 참 얄궂다고 느껴진다. 정말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런 풍경을 보게 되는구나.
십수 년 전만 해도 파양을 하는 부모는 괴물같이 생겼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를 사랑으로 품지 못해 방임하거나 학대하는 이들은 모두 머리 위로 뾰족한 뿔이 나있어 누구라도 알아볼 만큼 악한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살아보니 그렇지 않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 일들이, 결코 나는 아닐 거라고 믿는 삶 속으로 어느 순간 비집고 들어간다.
감격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