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목박진목은 일제 강점기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6.25 한국전쟁이 발발 직후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남과 북을 오가며 '종전평화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지금은 먼 옛 이야기>(경희출판사)에 수록된 사진.
해방정국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남로당 경북도당의 간부로 활동했던 박진목은 "설득과 이해 이상의 어떤 투쟁도 애국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로당과 결별했고,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9년 서울로 이주해야 했다.
박진목이 노량진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박진목은 1949년 시내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독립운동 시절 동지 채순기의 도움으로 옆집에 "방 하나를 세 얻어" 첫 노량진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셋집에는 대구청년동맹, 신간회대구지회 등의 간부로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옥살이를 했던 김선기(1906~?)도 자주 들렀다. 김선기는 1944년 함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동지이자 힘든 감옥 생활을 잘 이끌어주던 선배였다. 박진목은 1949년 자신의 노량진 셋집에서 종종 자고 가기도 했던 김선기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다.
일제 때 나라를 찾겠다고 같이 일했다는 동지의 정이란 참으로 놀라웠다. 어느 의사(義士)의 글에, "나는 부모의 사랑보다 아내의 사랑보다 자식의 사랑보다 더 높은 사랑을 발견했다."라는 글귀가 생각나기도 했다.(박진목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 – 민족수난의 기록』)
박진목과 김선기는 한강변 나루터의 한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을 비롯하여 해방정국에서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한편, 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괴로워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진목, 6·25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종전평화운동'에 나서다
박진목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민간차원에서 종전평화운동을 벌인 인물로 더 유명하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박진목은 남북의 지도자를 설득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을 끝내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4 후퇴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종전평화운동을 시작했다.
박진목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대동단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익환(1889-1959)과 함께 조남진의 소개로 남로당 출신의 조선노동당 제3비서 이승엽을 만나 '종전만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면서 종전을 호소했다. 이승엽은 취지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종전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위해 '남쪽으로 가서 실권으로 가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군 측의 신임장을 받아가지고 오라'고 했다.
박진목과 최익환은 남쪽으로 와 이승만 대통령과 접촉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다만 해방정국에서 하지 사령관의 통역을 했던 이용겸을 통해 미대사관 대사 대리를 만나 종전평화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박진목은 북한의 의중이 궁금했던 미군 정보부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박진목은 미국 측의 권유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서 재차 이승엽을 만나 다시 한 번 종전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때도 이승엽과는 종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굳은 악수를 했지만, 이승엽은 여전히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국 측의 신임장을 가지고 와야만 정식 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박진목, 남과 북 양측에 '간첩'으로 의심받다
그런데 10일 기한으로 추진했던 박진목의 평양방문은 북한의 기관간 소통 문제까지 겹치면서 박진목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기한을 훌쩍 넘긴 40일을 허비해야 했다. 이는 박진목이 서울로 돌아온 후 북의 간첩으로 의심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진목은 부산으로 내려가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종전평화운동에 대한 지지세를 넓혀나가면서 이승만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이때 사업을 하고 있던 박진목의 고향 선배이기도 한 서울공고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가 취지에 공감하면서 1200만 원의 거액을 운동자금으로 내놓아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으로 북진하여 통일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휴전에 반대하던 이승만과의 면담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간첩으로 몰려 김창룡의 특무대에 연행되어 1년 정도 감옥살이를 하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야 석방되었다.
박진목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엽을 만나기 위해 북으로 갔던 대동단 출신의 최익환도 이승엽이 숙청되는 바람에 만나보지도 못한 채 북에서 1년 정도 억류생활을 하다 돌아와야 했다.
결국 박진목과 최익환의 종전평화운동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박진목의 종전평화운동, 조소앙 등 납북인사들을 격동시키다
하지만 박진목의 종전평화운동 차 평양을 방문한 소식이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피난하지 못하면서 납북되었던 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이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납북인사들은 조소앙·안재홍·김약수·엄항섭·원세훈 등 5명을 대표단으로 선정하여 북한 당국과 협의하여 종전평화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호소문, 편지, 성명서 등을 작성하였고, 유엔에 대표단을 파견하고자 소련은 물론 미국 측과도 교섭에 나섰지만, 소련 주재 미국대사관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대표단의 남한 파견 역시 판문점의 미국 측 연락장교 키니 대령의 거부로 편지 전달조차 성사되지 못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소련 대사를 통해 편지를 유엔과 미국·영국 정부 등에 보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박진목, 평생 독립운동가를 챙기면서 평화통일을 위한 삶을 살다
박진목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혁신세력의 규합과 평화통일을 위한 운동에 나섰다. 광복회의 전신격인 (사)애국동지원호회(초대 회장 문일민)에 이사로 참여하면서 이강 등 생존해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원호하는 일도 했다. 이때 이강은 1955년 2월 9일에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애국원호회에 출석하여 제인의 집합을 고대하여 노량진 박진목씨의 초대에 응하다. 성찬을 포끽(飽喫)하고 또 유명한 가수의 창가와 가야금을 듣고 기념사진을 취한 후에 5시 반경에 회가하다. 그리하여 3시에 봉약(逢約)을 위반하다. 기왕 독립운동자들을 위하여 초대한다는 것은 희유한 사(事)로 감개무량함으로 금치 못하여 낙루까지 하다.(<이강일기>, 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