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 여사와 그의 맏손자인 김인이 어렸을 적함께 찍은 사진.
"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겠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의 생신이었다. 청년 동지들이 생일잔치를 준비하는 것을 알아차린 곽낙원 여사는 "그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기꺼이 모은 돈을 드렸다. 하지만 생일상을 차리지 않았다. 대신 독립운동에 쓰라며 권총 두 자루를 사 청년 동지들에게 건넸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들을 돌볼 때 일화다. 그는 자신의 팔순 때는 잔치 대신 일본과 싸우라며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붓으로 싸우라는 의미였다.
수감된 아들에게 "경기감사 한 것보다 기쁘다"
백범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의 고향은 황해도다. 아들 김구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을 가르치며 출세를 꿈꾸도록 했다. 하지만 김구는 반일 감정을 키웠다. 1896년에는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기 위해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스치기(土田壤亮)를 살해했다. 이 일로 아들이 감옥에 갇히자 곽 여사는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김구는 또다시 15년 형을 받았다. 아들을 옥바라지하던 어머니도 항일의식이 커졌다.
<백범일지>에는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와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또 1915년 4년 만에 출옥한 백범을 위해 친구들이 위로연을 열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키자 어머니가 대노해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김구가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자 곽낙원은 아들을 따라 망명했다. 이후 며느리(최준례 여사)가 일찍 병사하자 손자 둘을 거두며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최준례 여사는 차남 김신을 낳은 후 폐렴에 걸려 고생하다 이역 땅인 상해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동아일보>(1925년 11월 6일)의 "죽어도 고국 강산" 제목의 기사에는 곽낙원 여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약 4년 전에는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아들 김구가 있는 상해로 건너와서 이역 타관에서 분투의 생활을 했다. 2년 전에는 김구의 아내가 병마에 걸리어 이역 강산에서 생을 마감하자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오직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6살 손자와 두 살이 된 손자를 데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냈다.
근일에는 다시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다. 아들이 만류하자 '백골이나 고국 강산에 묻히겠다'며 상해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일반인들은 '그가 조선에 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어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며 근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