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정용담정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의 '동학 성지'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담정은 수운이 도를 깨친 후 동학을 창시한 곳이자, 그가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사진의 건물은 1975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만진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섭리였는지, 최시형의 인근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진작부터 수운 최제우의 존재와 파격적인 발언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고,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그래선지 따르는 사람도 많다고 하고, 세상은 곧 천지개벽할 것이라는 풍문도 따랐다.
최제우가 득도하여 1861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하자 어진 선비들과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11월에는 지방 유생들이 그를 서학쟁이로 몰아 발고하면서 관으로부터 탄압이 따르자 호남지방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 은거하였다. 이때에 「논학문」ㆍ「수덕문」등을 지었다. 이듬해 7월 호남을 떠나 경주부 청송으로 돌아와서 백사길과 박여대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관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서 포덕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포덕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 최시형은 경주 용담정으로 최제우를 찾아갔다.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초 5일 득도를 한 후 1년이 지난 신유년에 이르러 포덕을 하게 되자 해월신사는 경주 용담정으로 찾아가 대신사의 가르침을 받고 입도를 하였다. 입도한 해월신사는 한 달에 서너번 씩 대신사를 찾아 뵙고 설교, 강론을 듣고 도법(道法)을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하루는 "대신사께서 독공하실 때 한울님 말씀을 들었다 하니 내 성력을 다 하여 한울님 마음을 움직이게 하리라" 하고, 추운 겨울 날 집 아래 계곡의 찬물에 매일 목욕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자 물이 차지 않고 밤이 어둡지 않는 듯 하더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라는 소리가 들리므로 냉수욕을 중단하였다. 신사께서 이 말씀을 들은 후 대신사를 뵙고 이 상황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더니 대신사께서 "그대가 한울님 말씀을 들은 시간은 내가 수덕문을 읊던 시간이니 나의 글 읊는 소리가 그대의 귀에 영감으로 들린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련을 거듭한 해월신사는 이해 3월에 대신사로부터 '포덕에 종사하라'는 명교를 받고 영해ㆍ영덕ㆍ상주ㆍ홍해ㆍ예천ㆍ청도 등지를 순회하여 많은 포덕을 하였는데 이때 검악포덕(劍岳布德)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주석 9)
최제우는 자신의 신변에 머잖아 변고가 닥칠 것을 예상하고, 동학의 교단을 지키기 위해 최시형으로 하여금 후계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1863년 7월 23일 최제우는 40~50명의 도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였다. 북도중주인이란 경주이북 지역의 도중(道中)을 말한다.
마침 경상(최시형)이 오자 오랫 동안 상담하고 나서 특별히 북도중주인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탄식하며 노여운 기색을 보이는 듯 하다가 다시 기색을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르기를 진실로 성공자(成功者)는 가는 것이다. 이 운수를 생각하니 필시 그대 때문에 생겨났다.
이제부터 도의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나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도록 하라.
경상은, 어찌하여 이런 훈계말씀을 하십니까 하자 선생은 이는 곳 운이니라 난들 운이니 어찌하랴. 그대는 마땅히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경상은 다시 말하기를 선생의 교훈의 말씀은 저에게 과분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웃으시며 일인즉 그리되었다. 걱정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주석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