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박길수
해월 최시형은 동학사는 물론 우리 근현대사의 전개에 있어서 지을 수 없는 세 가지 큰 역할을 하였다.
첫째는 스승 최제우가 남긴 동학의 불씨를 살리고 키우고 불을 지폈다. 가정이지만, 그 시기에 해월이 아니었으면 과연 동학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고, 수운 교조의 법설과 사상이 온전히 전해지고 조직이 확장될 수 있었을까 묻게 된다.
둘째는 동학혁명 당시 남북접이 대립하여 주전(主戰)이냐 화전(和戰)이냐로 갈렸을 때 간부들의 뜻을 받들어 주전론을 수용하면서 동학은 혼연일체가 되어 '척왜양'과 '보국안민'의 혁명전에 나서게 되었다.
셋째는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교도와 민중들을 집결하고, 이것은 군주체제의 금제선(禁制線)을 뛰어넘어, 반봉건ㆍ반외세의 민족ㆍ민중운동으로 진화되고, 현대 시민운동의 원류가 되었다.(둘째와 셋째 부분은 뒤에서 상론)
해월 선생은 관군의 추적을 피해 35년 동안 은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오지 마을 50여 곳으로 몸을 숨기며 산골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포교를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스승 수운의 '시천주'에 이어 "세상의 모든 사람,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 모두 한울님 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을 정립하고 설파하였다.
해월 선생의 종교적 경지는 뒷날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만을 공경한다는 경천(敬天)을 넘어,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敬人), 만물과 하나됨을 통해 만물을 아끼고 또 공경하는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해월 선생의 종교적 경지를 바탕으로 하는 가르침은 오늘 인류가 겪고 있는 자연 환경의 폐해에 대한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즉 오늘이라는 현대에 이르러, 환경 파괴의 심각성과 함께 비로소 제기되고 있는 생태 및 생명의 문제를, 해월은 이미 100년 전에 구체적이며 근원적인 면에서 제기했었다. (주석 4)
주석
1> 『천도교경전』, 「해월선사법설 - 삼경」
2> 『천도교 창건사』 2권, 71쪽.
3> 『천도교 창건사』 「천도교서」, 7쪽.
4> 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서소문옥중생활과 처형과정」, 『동학학보』 제38호, 68쪽,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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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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