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 현재 다른 사람이 실제 생활하고 있다.
이근주
예관 선생은 신혼 초에 서울에 유학하면서 부인과 이별하고 뒤이어 중국 망명으로 긴 세월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ㆍ1혁명이 발발할 때 부인이 아들 상호와 어린 딸(명호)을 데리고 '남편 찾아 3만 리'의 상하이에 왔다.
딸(申明浩)은 성장하여 1920년 민필호와 결혼하였다. 민필호는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의숙 4학년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 동제사를 거쳐 박달학원에서 공부하고 신규식이 국무원총리 겸 외무총장에 취임하면서 비서로 발탁되어 활동하고, 이후 상하이 인성학교 운영, 만주에서 조직된 신민부 참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독립신문』 발행, 김구 주석 판공실장 겸 임시정부 외무차장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아버지가 순국할 당시 10세이던 아들(申尙浩)은 17세 때 항주에서 요절하여 항주교외에 안장하였다. 예관의 부인 조정완 여사는 남편에 이어 외아들까지 사망하자 상하이에 칩거 중 일제가 이곳까지 점령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 송환되어 1945년 고향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