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열매를 맨손으로 수집하는 모습
노일영
전문적인 수집가의 모범적인 동작을 보여준 건 깍두기인 남편이었다. 이 인간은 손바닥으로 가지를 훑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핀셋처럼 사용해서 열매를 땄다. 작업반장이 옆에서 계속 구두로 주의를 주다가, 도저히 봐줄 수 없어서 옐로카드를 꺼내도 핀셋의 속도만 조금 빨라질 뿐이었다. 아마도 이 인간의 목표는 레드카드를 받고 작업 현장에서 퇴장을 당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각자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작업이 개시되자 털기조는 그제야 영장류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싸리나무를 꺾어서 쥐거나, 온갖 도구들을 손에 쥐고 나뭇가지들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맨손으로 시작해서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반나절이면, 엄청난 속도의 진화라 할 만했다.
털기조의 작업이 수집에서 채집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바닥에 펼쳐놓은 깔개의 대부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면과 맞닿은 부분보다 가지나 바위 같은 장애물 때문에 허공에 떠 있는 부분이 더 많아서, 산수유 열매는 깔개 위가 아니라 바닥으로 더 많이 굴러 떨어졌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도 프로다운 근성을 보여준 팀이 운반조였다. 이 운반조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했다. 한 나무를 털고 나면, 바닥의 깔개에 떨어진 열매를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아서 선별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이 팀은, 한마디로 남달랐다.
분업의 개념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있던 이 팀은, 아마도 자신들의 어설픈 개입이 전체 작업의 흐름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깔개조와 털기조가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는 동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른 척했다.
오히려 소평댁 외 2명으로 구성된 이 운반조는 함께 나란히 바닥에 앉아서 깔개조와 털기조의 몸개그를 깔깔대며 즐기기까지 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이 운반조는 우리 조합의 산수유 사업에서 진정한 승리자라 할 만했다.
섬타던 중평댁-박영감 아저씨가 진정한 승자
산수유 작업 첫날, 중평댁과 박영감 아저씨 외 1명으로 구성된 선별조는 사실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작업반장이 털기조를 도와서 열매를 따라고 지시했지만, 선별조는 도합 220살에 가까운 나이를 내세워 명령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연륜이 묻어나는 심드렁한 반응에 패기만만한 반장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반장이 만든 선별조에 군말 없이 참여한 것만 해도 고마워하라는 결연한 표정에, 반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선별조는 운반조가 가져온 산수유 열매를 마을회관 앞에 펼쳐놓은 깔개에다 붓고, 나뭇잎과 잔부스러기들, 그리고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를 가려내는 작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콩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중평댁이 집에서 대형선풍기를 가져왔다. 선풍기 바람을 이용해서 잎과 잔부스러기들을 날려버릴 요량이었다. 자신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대형선풍기 앞에서 반장은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선별조는 깔개조·털기조의 슬랩스틱 코미디에도 관심이 없었고, 운반조의 박장대소와 포복절도에도 귀를 닫았으며, 기계조의 기계를 향한 저주와 욕설에도 초연했다. 선별조는 농사용 방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절대고수(絶代高手)에게서나 볼 수 있는 초월적 동작들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