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재개발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동아일보>, 1987. 3. 4)당시 언론은 정부의 '대책없는' 재개발 정책을 피판하면서 사당동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언급했다. 위 기사에 등장하는 사진도 사당2동 철거촌의 모습이다.
동아일보
쫓겨날 위기에 몰린 사당동 세입자들도 1985년부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당3동 산 24번지(가마니골)에 살던 세입자 700여 명은 그해 4월 4일 삼광교회(사당3동)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산 24번지'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을 발간하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결집시켜 나갔다.
이들은 서울시와 동작구청, 국회,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 등을 방문해 '세입자 대책 없는 재개발 반대' 등을 호소했지만, 현실의 벽은 단단하고 높기만 했다.
1985년 10월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지역구 국회의원 허청일 의원(민정당) 사무실을 방문해 "세입자 대책 없이는 재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선거공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허청일 의원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면담이 이뤄지지 않자 주민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는데, 면담에 응한 허청일 의원이 "내가 언제 그런 공약을 했느냐"면서 화를 내고 나간 직후 경찰에 의해 곧바로 강제 해산을 당해야 했다.
같은 해 11월 8일 어렵게 성사된 서울시장과의 면담에서는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가 돈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혜택을 줄 수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는 능력대로 사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없는 대로 그 수준에 맞는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좋은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 달 쯤 후에는 도시재개발에 대한 석사논문 자료를 준비하던 S대 대학원생(도시공학 전공) 김아무개씨가 사당동 철거지역에서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84년부터 사당동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몇 차례 자료조사와 설문조사를 하던 그는 사글세방(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만 원)을 구해놓고 논문 준비를 하던 중 학문의 현실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논문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택하겠다"는 말을 남긴 후 사당3동 동사무소 앞에서 주민 30여 명과 함께 '대책 없는 철거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언론은 경찰이 김아무개씨를 연행하려고 하자 한 통의 라이터 기름을 몸에 뿌리고 "분신자살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소란을 피우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사당동 철거지역, 1987년 대선 후보들이 찾는 단골 장소가 되다
사당동은 1987년에 이르면 6월 민주항쟁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되면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대선 후보들이 도시빈민정책을 내세우며 찾는 단골 장소가 됐다.
10월 3일에는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사당3동에서 벌어진 서울시철거민협의회가 주최하는 '빈민대동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총재는 도시빈민정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굿판을 관람한 후 사당2동으로 옮겨가 "민간민선정부가 들어서면 군사독재정권이 전경대 육성·최루탄 구입 등 정권유지를 위해 쏟아 넣었던 '정권유지비' 전액을 모두 철거민 구호에 돌려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해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은 김영삼 총재보다 19일 정도 늦은 10월 22일 사당동을 찾았다. 김대중 고문은 사당2동 세입자대책위에서 민통련(민주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통해 초청했는데, 사당동 철거민촌을 들러 150여 명의 철거민 등이 모인 자리에서 "부자만 잘 사는 철거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정부는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자신의 도시빈민정책을 알리는 연설을 한 후 사당 시장에 들러 주민들을 만나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당3동 산 24번지에서는 YS와 DJ의 방문을 전후한 시기에 철거반원에 의한 세입자 폭행사건이 벌어져 20여 명의 철거민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심지어 이를 취재하던 경향신문 이아무개 기자가 주택조합원들에게 한때 감금당한 채 폭행당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보통 큰 선거를 앞두고는 강제철거도 일시 중단하는 게 상례인데, 이 당시 사당동에서는 취재기자마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으니 강제 철거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치열한 3년간의 싸움 끝에 사당3동 산24번지 세입자대책위는 대선 직전 이주비 300만 원 지급과 공공임대 아파트 건설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합의하면서 먼저 투쟁을 마무리했다. 이후 그 자리에는 대림아파트가 들어섰다.
사당3동 세입자들의 합의와 사당2동 세입자들의 계속되는 투쟁
하지만 사당3동 산24번지 세입자들의 합의가 있었고, 그해 대선에서 사당동 철거지역을 방문한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낙선하고 사당동을 방문하지 않은 노태우 후보가 오히려 당선되는 이변(?)이 있었음에도 사당2동 세입자들은 매주 월요일 총회를 개최하면서 철거 싸움을 다음해에도 계속 이어갔다.
이 시기 사당2동에서는 1987년 12월 27일 뒷집 축대가 무너져 내려 6세의 한 어린이(임채의)가 압사당하는 사고도 있었고, "사당동은 또 하나의 광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거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하면서 많은 주민이 다치는 일도 속출했다.
1988년에 들어 사당2동 세입자들은 '재개발 반대 및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도시빈민 대회'(1/31), '대보름 맞이 사당빈민 대동제'(3/3)를 연이어 개최한 후, 5월 14일에는 세입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4통 공터에서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사당주민 단합대회'를 개최해 "현 재개발정책은 도시빈민 세입자의 생존권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정부는 도시빈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인 '장기융자 임대주택'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정부가 직전에 내놓은 보증금 300만 원의 세입자 특별분양 아파트(7평)에 대해서도 방이 하나에 불과해 서너 명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정책"이라며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세입자들은 13평 이상(방 2칸)에 보증금 없는 월 5만 원 수준의 임대주택을 요구했다.
1988년 6월 14일 사당2동 세입자 300여 명은 동작구청에서 세입자 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농성한 후 사당동까지 행진하여 돌아오기도 하면서 동작구청을 압박했다. 이어 11월 1일부터는 동작구청 앞에서 장기 저리 임대주택 제공과 동작구청장 면담 등을 요구하면서 300여 명이 무기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동작구청은 경찰을 동원하여 농성 중인 사당2동 세입자들을 경찰차에 태워 난지도 쓰레기처리장에 내려놓기까지 했다.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사당동 철거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