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눈빛출판사
신규식은 1919년 4월 30일부터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지역의원으로 선임되고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은 손정도 목사였다. 1920년 3월까지 의정원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 7월 14일 부의장과 의원직을 모두 사퇴한다.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다. 건강이 다소 회복되면서 1920년 9월 법무총장이 되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국무총리 이승만의 선출과 관련 그의 위임통치론을 둘러싸고 이회영ㆍ신채호 등이 반대하고, 다시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직제가 바뀐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 사이의 갈등이 첨여하게 대립하였다. 일부 각료가 취임을 거부하거나 사퇴하면서 이동휘와 안창호도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1921년 5월 하와이로 떠나면서 신규식을 국무총리대리로 임명하였다. 난마와 같이 얽힌 임시정부의 수습이 그의 손에 맡겨졌다. 5월 20일 임시의정원 폐원식에서 그는 단합을 호소하였다.
오날의 폐원식을 당하야 무삼 말로써 제위께 들일지 몰으겟소. 다만 당석(當席)에서 엇은 감상을 말하겠소. 제원(諸員)께서 이 간험(艱險)하고 분규(紛糾)한 시국에 입(立)하야 위난을 무릅쓰고 여일히 분려(奮勵)하였슴을 감사하고 흠앙(欽仰)하오. 기성(旣成)한 국가에서라도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이 일치(一致) 협화(協和)치 못하면 기(其) 권력을 상실할 것이오.
그런데 오날 우리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의 맥락이 잘 통하고 유지됨은 다 제위(諸位)의 협동하는 성력에서 출(出)함인 줄 아오. 우리의 압흐로 행할 바가 대단하고 요원(遙遠)하니 우리는 더욱 분려(奮勵) 하여야 될 줄 아오. 그리하면 저 왜적은 다 소탕될 지오. 설령 못 된다 가정할 지라도 적에게 한인의 기개를 보이는 동시 공포와 좌절을 줄 것이오, 따라 적에게 아부하는 자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오.
또한 앞으로 더욱 노력하고 분투하기를 의뢰하고 후망(厚望)하오. 그리하면 나는 비록 무력(無力) 무책(無策)하나마 성심으로 노력하는 이를 따라 돕겠소. 우리의 장래는 낙관과 활망(活望) 뿐이외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