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수 작가가 2018년 11월 <우태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SNS에 올린 글. 식당에서 거절당한 경험을 어린이의 시선에서 작성했다.
전이수
누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는 노키즈존이야."
"그게 뭐예요?" 하니까 "애들은 여기 못 들어온다는 뜻이야" 한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우리는 밥 먹으러 왔다니까요. 오늘 제 동생 생일이거든요!" 그 누나는 화가 난 채로 다시 말했다.
"여기는 너희는 못 들어와. 얼른 나가!"
문밖을 나와 우태를 보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 2018년 작가 전이수(11) 인스타그램 게시물
'노키즈존(No Kids Zone, 아이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인 식당이나 카페, 가게에는 가지 않는다. 큰 소리로 우는 아이가 내가 있는 공간에 있을 때면 웬만하면 절대 바라보지 않으려고도 한다.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에 대한 차가운 시선들과, 그 시선들 때문에 진땀을 빼는 양육자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울고, 칭얼거리고, 떼를 쓰는 행위가 어느 순간 짜증스러운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마치 인간의 성장 과정상 누구나 그럴 때가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말이다.
노키즈존은 그대로 '맘충(극성맞은 부모)'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사회적 배려와 충분한 인프라가 없는 현실이 지적되기보다 공적인 장소에 나온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 되어버릴 때, 노키즈존과 맘충이라는 단어가 함께 탄생한다. 동시에 아기와 어린이, 청소년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때 이들의 행위는 '귀찮은 것'이 되고,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여성의 잘못으로 이어진다. 누구는 "일부 무개념 엄마들만 '맘충'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아기를 안고 문밖을 나가는 순간 모든 여성이 잠재적 '맘충'으로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안다.
누군가는 그 '맘충'이라는 말과 '노키즈존'이라는 공간 속에서 타인을 비난하며 편안함을 얻을 수 있겠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추방을 통해 만들어진 고요함을 즐기고 싶진 않았다. 타인을 추방하고 배제하면서도 진짜 피해자는 나 자신이라 말하며 그 행위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노키즈존에 가지도 않고, 일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비서로 일하는 국회라는 공간이 거대한 '노키즈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키즈존을 피해가며 살아왔다고 28년간 믿고 살았는데, 2021년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이 거대한 노키즈존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알자 노키즈존을 거부해왔던 28년의 노력이 노키즈존에 갈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지 바깥의 답, "노키즈존이 없는 세상"에 가닿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키즈존' 국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