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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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길은 온갖 고초가 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어(중국어)가 통하여 중국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18세 때에 관립한어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대한협회에서 활동할 시기 『대한협회보』에 실린 「해외정형(海外情形)」ㆍ「외국정황(外國情況)」 등의 외신을 통해 중국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옌징에 도착하여서는 먼저 이곳에 와 있던 무관학교 동기생 조성환을 만나 중국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신규식은 1909년부터 1922년까지 10여 년 동안 160여 수의 율시와 산문시를 지었다. 국치 전야에서 중국 망명기간이다. 『아목루(兒目淚)』 "나라를 빼앗긴 소년의 피눈물"이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망명객의 아픔과 슬픔을 현지에서 그때 그때 지은 기록이다. 『아목루』에서 그가 거쳐간 망명길의 코스를 살필 수 있다.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며」이다.
강물은 저와 같이 흘러가는데
언제나 다시 동으로 돌아올까
수없이 많은 열혈 인사들
박랑사에서 환호성 부르리라. (주석 6)
박랑사(博浪沙)는 한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하자 장량은 원수를 갚고자 창해역사에게 철퇴를 들려 시황제를 저격케 하였는데 빗나가서 시황제의 부거(副車)를 맞췄다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그에게 시황제는 일본제국주의였다.
압록강 건너 안둥(安東:현 단둥)에 도착, 여관에서 일박하면서 「안둥현 1번지에 도착하여」를 지었다. 먼 길을 오느라 봄날의 흙먼지를 뒤집어 쓴 초췌한 망명객의 모습이 드러난다.
귀신 형상에 먼지 투성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에 모자도 없이
세 조각 문창호지로 싼 봉지에
구명 약 몇 봉지 싸서 넣었네
나라 잃은 아픔은 사무치는데
갈 길의 어려움이 웬 걱정이람
안둥 고을에 이르러 내렸으나
벗들도 내 얼굴 못 알아 보누나. (주석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