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가 1967년 동아일보에 투고한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다"는 제목의 글최은희는 1967년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 직후에는 3·1여성동지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3·1여성국민회의 대표위원(1971)과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을 맡는 등 1919년의 3·1 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동아일보
최은희는 1967년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 직후에는 3.1여성동지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1971년에는 3.1여성국민회의 대표위원, 1981년에는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을 맡는 등 1919년 3.1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여고보 재학 시절 열여섯의 나이로 3.1만세운동에 참여해서 두 번이나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은희는 최은희여기자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은희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24년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소개로 그해 10월부터 <조선일보>의 '부인기자'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최은희가 일간신문 최초의 여성 기자가 되지 못한 것은 192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매일신보> 기자로 최은희보다 먼저 일한 이각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희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다음 해에는 허정숙이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일했다. 최은희는 민간신문 최초의 여성 기자였던 셈이다.
최은희는 1924년 입사 직후 행랑어멈으로 변장해 취재에 뛰어들었는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경성상공을 날면서 취재하는 등 열성 기자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었다. 최은희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조선일보>가 1984년부터 해마다 시상하는 최은희여기자상은 여성 기자들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상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최은희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40년 기간 속에서 한국 여성의 독립운동 활동 비사를 원고지 6000매 분량으로 집필해 <조국을 찾기까지>(1973)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꼼수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독립공원' 조성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정권은 갓 서울에 편입돼 비교적 땅값이 싼 사당동에 부지만 지정해놓고 실제 공원 조성은 예산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는 꼼수를 부린다.
이는 비슷한 시기 3.1빌딩이나, 3.1시민아파트, 3.1고가도로의 신속한 건설과도 대비된다. 관철동에 있는 3.1빌딩은 63빌딩이 건설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고, 청계천변 황학동에 있었던 3.1시민아파트는 1969년부터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건립한 시민아파트였다. 84년부터 청계고가도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철거된 3.1고가도로 역시 경제 개발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사업은 독립공원 조성사업과 달리 본래 목표인 경제개발에 충실하면서도 단지 이름만 붙임으로써 3.1만세운동 같은 독립운동의 역사도 신경 쓰는 듯이 생색낼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최은희를 비롯한 3.1여성동지회의 '헌수 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까지 나서고, 중앙대생 1200여 명도 참여하여 무궁화를 비롯하여 상록수, 정원수 등 7만여 그루를 심으면서 애지중지 가꿨음에도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