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후 촬영한 기념 사진
사진가 권태균 제공
1900년대 초 국가안위가 누란의 위기로 빠져들고 있을 때 조선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문명개화를 말하고 이에 기초한 산업부흥과 교육진흥을 통한 실력양성론을 역설하였다. 1900년 11월 서대문~청량리 노선의 전차가 개통되고 비슷한 시점에 서울 진고개의 일본인 상가에 민간 전등이 설치되었다. 1902년 3월에는 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들에 의한 이와 같은 '사건'은 엄청난 변화이고 문화적 충격이었다. 게다가 1904년 2월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섬나라 승냥이와 대륙의 북극곰이 저들 나라를 놔두고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한 가운데 한일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신규식은 틈나는 대로 향리에 내려와 자신이 세운 덕남사숙 학동들에게 시국을 말하고 정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손수 지은 노래를 가르쳤다.
아 대한국 만세
부강기업(富强基業)은 국민을
교육함 존재함일세
우리는 덕을 닦고 길을 바로어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 봅시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나라의 기초는 우리 학도님
충군신 애국성을 잊지맙시오
활발히 경주하여 전진함에
허다사업을 감당할려이면
신체의 건장함이 청백이로다.
천지도 명랑하고 평원광야에
태극기 높이 달고 운동하여 보자. (주석 1)
이 시기 그는 대한제국의 장교 신분으로 1904년 4월 진위대 4연대 1대대를 견습한데 이어 10월에는 모교인 육군무관학교를 견습하였다. 그리고 1905년 3월 6품으로 승급하였다. 교육사업에 진력하면서도 무관학교와 끈을 잇고 있었다. 국가위난시 최후의 보루가 군인이라고 믿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