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선생의 영정신숙주 선생의 영정
신숙주는 그밖에 『경국대전』 『세조실록』 『동국통감』 『오례의』 등의 편찬에도 관여했다. 세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고 고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계해조약을 맺어 일본인의 왕래를 공식화했고, 함길도 도체찰사로 북쪽의 야인을 토벌하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어린 왕자를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런 부탁을 받은 신하를 고명지신(顧命之臣)이라고 하는데 무거운 책임도 따랐지만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때 함께 문종의 사랑과 부탁을 맡은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 등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이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 편에 서서 이들 사육신의 고문에 관여했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를 따라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오면서 둘이 친해진 것이 사육신과 다른 길을 걷게 된 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일로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 변절자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선비사회는 물론 일반인들도 여름철 쉽게 상한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일컬을 정도로 세간의 비난이 따랐다. 반면에 그의 문화사적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신숙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보다 절의가 중한지의 문제는 방법과 목적과의 관계처럼 미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미묘함이 신숙주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갔을 뿐,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또 그가 비난받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그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그가 뛰어난 학자요 또 세종ㆍ문종의 충신이었기에 따르는 유명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그가 역사에 얼마만한 업적을 남겼을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많이 죽인 세조 밑에서 신하노릇했다는 것만으로 신숙주를 비난해서는 위의 여러 사정으로 보아 온당치 못할 것이다.
여담으로, 그가 살아 남았기에 우리 역사 속의 두 거인이 그의 자손들에서 태어났다. 독립투사인 예관 신규식과 민족사가인 단재 신채호가 그들이다. (주석 1)
주석
1> 이이화, 「신숙주」, 『인물 한국사』, 32쪽, 한길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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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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