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토양
픽사베이
"날씨 때문에 작황이 너무 안 좋아서..."
언제부턴가 이런 말을 참 많이 듣고 산다. 며칠 전 경기도 농민들을 만날 때였다. 농민들이 '쌀값을 보장하라'는 현수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작년에 쌀값이 얼마나 좋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집밥만 먹는데 쌀값을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느냐고 되물었더니 농민들은 '도시민들은 저렇게 생각하나 보다'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따뜻한 겨울과 긴 장마 이후 수확량이 확 줄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찍 심은 조생종 벼는 30~40% 줄어든 폭망 수준으로 쌀값이 올라도 도지(소작료)에 농약값에 이것저것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거다. 쌀의 고장 경기도에서 30년 넘게 농사 지어온 선수들의 말이었다. 아침에 눈 뜨면 들녘에 나가 불어오는 바람결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온 그들은 몇 번이나 내게 말했다. 이런 날씨 처음 겪는다고.
이제 농산물 가격보장만으로는 식량공급을 장담하기 힘든 세상이 왔다. 그동안 공업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위해 묵묵히 희생해온 농업은 이제 기후의 역습 앞에 아예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걱정을 할 무렵 '탄소 농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토양을 살려 기후변화에 대응한다는 이상한 나라의 농부들 말이다.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 생긴 일
"(2017년) 포도 수확이 시작되는 9월초 기온이 화씨 110도(섭씨 43도)를 넘어섰다. 이상고온은 나파 밸리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뉴욕타임스>, 2019.10.31)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그러나 천하의 나파 밸리도 기후변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2015년에는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1~2월 날씨가 포도의 이른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런데 그해 5월 한파가 찾아와 수확량이 40~50% 줄었다. 2017년 10월에는 강한 바람과 건조한 날씨가 일으킨 산불이 덮쳐 건물을 태우고 포도농원을 검은 연기로 뒤덮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나쁜 품질의 포도가 수확되기도 했다.
산불은 이후 5년간 캘리포니아 전 지역을 가뭄에 시달리게 했다. 산불로부터 시설을 보호하려는 전기회사가 전원공급을 끊는 바람에 와인 농원들은 며칠간 정전상태에서 살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개인주의로 악명높은 나파 밸리의 와인 생산자들도 기후변화 앞에 힘을 합쳐 맞서기 시작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한다. 생산자 700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기후변화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이 중에는 일찌감치 토양을 살리는 농법을 실천해 캘리포니아주의 기후대응 보조금을 받고 있는 와이너리도 있다. 매티아슨 부부가 운영하는 농장이 대표적이다.
토양 살려 기후대응보조금 받는 와인 농장
질과 스티브 (매티아슨) 부부는 지난 2003년부터 나파 밸리에서 와인을 만들어왔다. 지속가능한 농업과 로컬푸드 운동을 실천하려고 와이너리를 만들었기에 농장 이름도 기업형태의 브랜드가 아닌 '매티아슨 가족 포도농장'이다. '최고의 비료는 농부의 발걸음'이라는 신념을 가진 이들 부부는 18년째 친환경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어 헌신적인 환경운동가로 불려왔다.
그런데 요즘에는 '캘리포니아의 기후 전사'로 통하고 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주가 기후변화 대응 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조성한 기금을 통해 3만1445 달러(3400여만 원)를 지원받는다. 아내 질 클라인씨는 지원금을 받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저의 삶은 '기후'가 좌우합니다. 농민으로서 우리는 기후변화 방어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후변화 영향을 줄여나갈 모든 것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찾아낸 기후대응 기술은 무엇일까? 알고 봤더니 첨단기술도 신기술도 아니었다. 그저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일이다.
퇴비를 많이 준다. 퇴비는 와인생산 공정에서 나오는 유기성 폐기물을 재활용해 직접 만들어 쓰고 있다. 풀을 많이 심는다. 포도나무 밑에 여러해살이 녹비작물을 심어놓아 수확이 끝난 겨울철에도 파란 풀들이 농장 바닥을 뒤덮고 있다. 곳곳에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야생동물과 곤충과 새들의 서식처를 제공했다.
밭을 가는 경운작업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 결과 뿌리를 깊이 내린 풀들이 농장을 뒤덮고 있다. 포도를 묶을 때 쓰는 끈은 플라스틱 대신 자연분해되는 식물성을 쓰고, 가지치기한 포도덩굴은 태우지 않고 잘라서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낸다.
쉽지 않은 실천이지만, 방식 자체는 우리나라 친환경 농민들도 많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농사방식이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길이라고?
"탄소를 토양 속에 가둬놓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납니다. 토양이 물을 보유하는 용량이 늘어나면 적은 물로도 포도나무에 물을 댈 수 있죠." (질 클라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