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리 앞바다(득량만). 장흥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
박만순
"계룡이 아버지! 계룡이 아버지 어디 있소? 살아 있으면 대답 쫌 하시오."
1950년 7월. 전남 장흥군 득량만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이면순(당시 37세)의 외침은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바다 한가운데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계룡아! 쩌기 보이는 거시 뭐다냐? 사람 아니냐?" 어머니 뒤에 서있던 조계룡(당시 13세)이 바다를 보니 그곳에는 갈치잡이 배만이 외로이 떠있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대답할 힘도 없었다. 아니 하루에도 수십 번 물어보는 어머니의 말에 신물이 나 대꾸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무이요. 쩌거는 갈치잡이 배라요." 아들의 대답에 이면순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머니의 축 늘어진 어깨에 소년은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해졌다.
남편을 잃은 이면순은 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졌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도 바다에서 이상한 물체만 보이면 눈동자가 빛났고 아들 조계룡에게 물어봤다. 그러기를 20일째였다.
당시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득량만)에서 시작된 이면순·조계룡 모자의 흔적 찾기는 서촌, 남포, 관산면 죽청리, 고마리, 장한도, 회진면, 대덕면 노녁도 등 장흥군 해안가로 이어졌다. 그렇게 이면순이 남편 조성섭(당시 35세)의 시신을 찾아 20일 동안 바닷가 일대를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밭일하다 끌려간 남편, 시신 한번 못 봐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전남 장흥군 해안가에는 이면순·조계룡 모자처럼 가족의 시신을 찾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3, 4가족이 배 한 척을 빌려 한 달 가까이 다니기도 했다.
이 대열에는 정예남(당시 30세)도 있었다.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에서 오순도순 살았던 정예남 가족에게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불행이 찾아왔다. 아내 정예남과 함께 밭두렁을 다듬던 백웅선(당시 37세)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백웅선씨, 지서에 잠시 갑시다." "무슨 일인데요?" "별일 아닙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용산지서 경찰의 말에 백웅선은 손바닥에 묻은 흙만 털고 일복을 입은 채로 경찰을 따라갔다. 하지만 저녁 때가 되어도 남편이 귀가하지 않자 걱정이 된 정예남은 지서로 갔다. 남편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이게 웬일이래요?" "너무 걱정 말고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 오시오." 당시는 한여름이라 매일 갈아입을 옷과 식사를 지서로 날라야 했다.
그날도 아침 일찍 부리나케 정예남은 용산지서에 갔다. 하지만 용산지서 유치장은 텅 비어 있었다. 경찰은 "장흥경찰서로 갔다"고 차갑게 말했다. 정예남이 장흥경찰서로 갔지만 이미 남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경찰서 인근 주민들은 "보도연맹원들을 굴비 엮듯이 묶어 수문리 앞바다로 갔다"라고 했다.
예남이 불길한 마음에 수문리 앞바다(득량만)로 뛰어갔지만, 거기에도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득량만에는 자신처럼 가족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수십여명이었다. 보도연맹원 가족의 애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인근 주민들은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바다에 던져 부렀소"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곡을 터뜨렸다. 1950년 7월 21일의 일이었다.
다른 유족들처럼 정예남도 시신을 보기 전에는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남편 흔적 찾기가 시작됐다. 예남은 태어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자식(백정하)를 등에 업고 한 달여를 바닷가에서 살았다. 밀물과 썰물 때 시신이 떠오른다는 말에 하루에 두 번 바다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나머지 시간에는 해안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혹여 시신이 떠밀려 오지 않을까 해서다.
한 달 동안 해멨지만 결국 남편 백웅선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정예남은 60여 년 동안 입에 갈치를 한번도 대지 않았다. '바다에 사람이 빠져 죽으면 갈치 떼가 제일 먼저 시신을 뜯어 먹는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정인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 갈 때도 수문리로 가지 않았다. 지름길인 수문리로 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남편이 생각나 멀리 돌아갔다.
"김일성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1950년 3월 8일 장흥경찰서 앞은 보도연맹원과 장흥군민 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날 열린 장흥국민보도연맹 결성식에는 1천여 보도연맹원과 각 관공서, 사회단체, 중학교 상급생 등이 참석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국민의례, 애국선열에 대한 묵념, 보도연맹 전라남도 간사장 등의 인사말 순으로 진행된 결성식의 마지막 순서는 보도연맹 주요 강령 제창이었다. "맹원(보도연맹원)들은 모두 기립하시오. 제가 선창하면 마지막을 제창하시오." 사회자의 발언에 참석한 보도연맹원들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한다" "절대 지지한다"
"김일성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남·북로당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보도연맹 강령의 선창과 제창이 끝나자 참석자 모두 박수를 치고 행사는 막을 내렸다. 이어서 시가행진도 했다. 행사에 참석한 백웅선은 장흥보통학교를 나와 일제강점기에는 원항어선을 타고 일본 오사카와 부산, 중국 등지를 다닌 '마도로스'였다. 해방 후에는 고향에서 농사로 소일하던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1947년부터 마을 백○○ 사랑방에서 몇 차례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어울린 게 '포고령 위반' 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