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많은 언어를 여덟 개나 구사하면서도 왜 인도인은 프랑스어를 배우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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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프랑스어권인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온 지 며칠 후부터, 아이 등하교길에서 같은 학교 학부모인 인도 출신 니투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고충에 대해 서로 맞장구를 치다가, 각자 구사하는 언어에 대해 물어보았다. 니투는 영어, 힌디어, 벵골어, 펀자브어, 마라티어, 텔루구어, 타밀어, 산스크리트어, 우르두어를 한다고 했다.
세상에나! 집에 와서 찾아 보았더니, 모어 사용자가 많은 순서로 20위까지의 언어들 중 무려 여덟 개를 구사하는 것이다! 영어(3위), 힌디어(4위), 벵골어(5위), 펀자브어(9위), 마라티어(10위), 텔루구어(11위), 타밀어(18위). 모어 사용자순으로 프랑스어는 겨우 15위였고, 독일어는 16위였다. 한국어의 순위는 의외로 꽤 높아서 14위였다. 그러니까 모어로서의 한국어 사용자가, 모어로서의 프랑스어 사용자보다 더 많았다(
위키백과 참고).
사용자 많은 언어를 여덟 개나 구사하면서도 왜 인도인은 프랑스어를 배우려 할까?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공용어 또는 세계어(lingua franca)가 되었지만, 그보다 모어 사용자가 많은 한국어는 왜 그렇지 못할까?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퍼뜨렸고 식민지들이 독립한 뒤로도 언어들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가 조금 더 길었다면 지금도 한반도에서 일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구 제국주의자의 후손들이 식민지를 착취한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아직까지 공용어 종주국이라는 이점까지 누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게다가 언어는 공기 같은 존재라서, 공용어를 편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기득권을 갖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한다. 힘겹게 공용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매 순간 부당함을 느끼는 반면, 공용어인 모어를 태어날 때부터 구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어가 갖는 권력을 매 순간 자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아이 학교에서도 영어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영어권 출신의 학부모가 대체로 학부모 대표가 되었다.
몇 달이 흐르고, 니투도 나도 프랑스어를 아주 약간 배웠다. 어느 날 다른 학부모와 다같이 이야기하던 중, 프랑스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이 나왔는데 니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라? 할 줄 안다고?
안녕하세요? 잘 지내요? 잘 지내요.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나는 의사예요. 나는 사과를 먹어요. 이게 뭐예요? 몰라요.
니투와 나의 프랑스어는 같은 수준으로 겨우 이런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수준이라면 나는 '프랑스어를 못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당연히 남들에게도 프랑스어 못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니투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니투의 벵골어, 펀자브어, 산스크리트어, 타밀어, 우르두어의 수준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만일 니투가 '프랑스어를 한다'는 수준으로 저 언어들을 하는 것이라면, 그건 내가 생각하는 언어 구사의 수준과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 구사 능력에 대한 인도인들의 느슨한 관점
얼마 뒤 <언어의 천재들>이란 책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게 되었다. 인도의 언어 환경은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도는 약 428가지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다중언어구사 사회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104개의 언어로 방송된다. 한 동네에서 쓰이는 언어가 10개~30개 정도 된다.
누구나 최소 서너 개의 언어를 구사하며, 다중성을 편안하게 즐기는 태도를 갖고 있다. 유창한 모어가 한두 개 있고, 다른 언어들은 그냥 웬만큼 하는 만큼만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길에서 간판 보는 정도, 장 보는 데 필요한 정도, 친척과 수다 떨 수 있을 정도 등등 필요한 만큼의 수준으로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
그렇게 다양한 수준으로 이 언어 조금, 저 언어 조금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어떤 언어를 '원어민처럼'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동네에서 쓰이는 언어 전부를 익혀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왜냐하면 상대방과 내가 공통으로 말하는 언어를 하나 찾기만 하면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중언어 사회에서 한 개인이 익혀야 하는 적정 언어의 개수는 몇 개인지, 사회과학자 조지프 콜로머는 게임이론으로 계산해 보았다. 계산에 따르면 열 개의 언어가 구사되는 사회에서 한 사람이 구사해야 하는 적정한 언어의 개수는 세 가지다. 이럴 경우 무작위로 모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성공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확률은 89%다. 즉, 모두가 모든 언어를 배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